한국야구대표팀이 2008 베이징올림픽 아시아 예선전(대만) 대 일본전에서 꺼내들었던 일명 ‘위장오더’ 또는 ‘위장타순’이라는 말은 사실 그 어느 야구용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마치 공식용어처럼 사람들의 입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것은 선발오더를 이용해 상대의 의중을 떠보려는 나름의 전술(?)을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위장오더라는 것은 말 그대로 거짓이 내포된 오더를 말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타순 전체를 허위선수로 메울 수도 있겠지만, 상대 선발투수의 유형에 따른 효과적인 대처를 위해 1~2명의 거짓명단을 슬쩍 타순에 올려놓는 것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다. 위장오더의 역사적인 유래는 상당히 깊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초는 일본시리즈 3연패(1956~1958)를 포함 무려 4번이나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어냈던 명장 미하라 오사무(당시 니시데쓰 라이온스) 감독이 1958년 일본시리즈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50년 가까이 흐른 요즘도 일본에서는 여전히 위장타순이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위장타순을 식별해내는 기록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일본프로야구의 방송프로그램을 보면 수비위치 숫자(1~9) 앞에 영문자 ‘A’를 덧붙여 이를 구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A’의 의미는 일종의 들러리다. 가령 ‘A7’ 이라면 이는 거짓 좌익수다. 실제 경기에 들어가서는 상대 선발투수에 따라 다른 선수로 바뀌게 된다. 한국프로야구에서도 과거 위장타순이 사용된 예는 적지않다. 당일 등판하지 않는 투수를 일단 선발 오더에 넣었다가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나면 막바로 상황에 따라 다른 선수로 교체하는 방식이 주였다. 그 가운데 타석에서의 은퇴경기를 위장타순 노릇으로 끝맺음 해야 했던 김건우(LG)에 대한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1997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선발 좌익수에 이름을 올렸던 김건우가 삼성 선발이 우완 김상엽으로 확인되자 주심의 플레이 볼 선언 후 곧바로 좌타자 동봉철로 교체되었던 일이다. 1997년 당시 김건우는 투수로서의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로 타석에 들어선 적이 없었던 터라, 좌익수로 선발명단에 올랐던 것 자체가 바로 위장타순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 일은 LG팬들의 집중적인 성토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김건우는 같은 해 10월 19일,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 패전처리로 나와 최종 1이닝을 던진 것을 끝으로 그 해 그라운드를 완전히 떠났다. 위장타순 소동을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해프닝이 있다. 1991년 여름, 삼성의 김성근감독은 해태와의 대구 홈경기에서 두 장의 오더를 작성했다. 하나는 우완 선동렬에 대비한 타순이었고, 또 다른 한 장은 좌완 김정수를 상대로 한 타순이었다. 경기 시작 1시간 전, 평소대로 오더 교환을 위해 홈 플레이트에 다가온 배대웅(삼성) 코치는 해태의 오더가 심판원의 손에 넘어온 것을 확인한 후, 슬쩍 심판원에게 상대 선발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배코치의 의도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심판원의 입에서 “선동렬”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배대웅 코치는 양쪽 뒷주머니에 나란히 꽂고 나온 두 장 중에서 선동렬을 상대로 준비한 우완투수용 오더를 꺼내 들었다. 이때 오더를 건네기 전 미리 상대선발을 물어보는 배 코치의 수상쩍은 행동에 낌새를 차린 해태 김봉연 코치가 달려들었고, 이 와중에 배코치가 갖고 나왔던 또 다른 왼손투수용 오더 한 장은 현장에서 발각이 되고 말았다. 이와 비슷한 일이 2001년 제34회 대만야구월드컵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다. 미국팀 감독이 두 가지의 오더를 준비하고 있다가 한국팀의 선발이 좌완 이혜천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오른손 타자가 주로 포진된 오더를 얼른 내민 일이다. 이러한 해프닝들은 한동안 위장타순에 대한 도덕적인 시비거리를 제공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위장타순이라기 보다는 ‘이중오더’라는 말이 상황에 맞는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번 올림픽 예선에서 일어난 오더 해프닝도 의도에 따라서는 물론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상대선발을 확인한 후 애초에 뛸 수 없는 선수를 다른 선수로 바꾼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장타순으로 보는 것은 어딘가 부적절하다는 느낌이다.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상대 선발투수에 따른 출전선수의 배열을 대폭 수정한 것은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통상적 관례를 빗겨간 에티켓상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비록 공식개념의 정규용어는 아니지만 위장타순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선발오더에 올린 미끼용(?) 선수(해당 위치에 전혀 맞지 않는 선수)를 경기초반 다른 선수로 바꿔치기하는 전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장타순은 선발투수 예고제가 의무적으로 시행되고부터 하나 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어쩌면 선발투수 예고제 시행의 단초는 위장타순의 남발이 불러온 것일 수도 있다. 야구뿐만 아니라 축구에서도 위장오더가 존재한다. 출전 예고 선수명단과 당일 출전선수 명단이 차이를 보이는 경우다. 야구든 축구든 위장오더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위장오더를 받아 든 쪽은 그때마다 상대의 도덕성을 걸고 넘어간다. 연장선상에서 해당 경기를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심정 사나운 울분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렇듯 위장오더는 나라와 리그를 불문하고 가급적 해서는 안될 전술로 각인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대접받을 수 없고 도저히 공인 받을 수도 없는 전술 아닌 전술인 ‘위장오더’의 끈을 손에서 아주 놓기란 여전히 힘든 모양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