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김성한, 술 한 잔은 안 됩니까? 1988년 9월7일 대전구장. 해태와 빙그레의 후기 8차전. 해태가 7회 수비에 들어갔다. 타자는 빙그레 장종훈. 장종훈이 1루 쪽으로 타격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 새 1루로 ‘육탄대시’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장종훈이 1루 송구를 캐치하던 김성한과 ‘쿵!!’하고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너무도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천하의 김성한’이라도 인간 육탄 앞에 어찌 성하겠는가. 왼손목이 뒤로 제껴지면서 손목 골절상을 입고 말았다. 당시 한국 최고의 스타였던 김성한. 그는 그해 104게임에 출장, 타율 3할2푼, 30홈런, 88타점으로 시즌 MVP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추세라면 페넌트레이스가 끝나는 한 달 뒤인 10월 19일부터 시작될 한국시리즈에서도 MVP는 ‘떼어 논 당상’이었다. 그런데 불행이 닥친 것이다. 호사다마랄까.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일단 응급처치로 반깁스를 했다. 며칠 후 운동장에서 김성한을 만났다. 아니, 웬걸. 응당 깁스를 하고 있어야할 김성한이 붕대만 둘둘 말고 있는 것 아닌가. “야, 뭐야, 왜 깁스를 풀었냐?” “누가 약 바르고 이렇게 압박붕대만 감고 있으면 된다던데요.”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냐. 당장 병원으로 와.” 나중에 알고 보니 스타플레이어인 김성한의 부상 소식을 듣고 자칭 ‘도사’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귀 얇은 그가 ‘도사’들의 ‘처방’에 따라 깁스를 풀어버렸다는 얘기다.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 이번에는 반이 아니라 전체였다. 반만 해놓으면 또 풀어버릴까 염려해 아예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면서 또 미주알고주알 주의사항을 풀어놓았더니, 김성한은 한술 더 떴다. “술은 한잔도 안 됩니까?” “술 한 잔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한잔 정도야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아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이게 또 사단(事端)이었다. 다시 예의 ‘돌팔이’ 소문이 쫙 돌았다. 이젠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녀석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아빠, 해태 선수들 그만 봐 주세요”라며 심통을 부렸다. “왜 그래?” “애들이 그러는데 해태 선수들이 아버지더러 돌팔이라고 한다면서요?” “해태 선수들 돌봐주고 돈 받지 않아. 돈만 밝히는 나쁜 돌팔이는 아니니 안심해라.” 그러나 씁쓸했다. 무슨 호사를 보고자 어린 아들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또 어린 녀석에게 내 처지와 처방 등을 어떻게 상세히 설명해 줘야 하는지 그저 한심하고 웃음만 나왔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1999년 10월엔가. 유남호, 김성한, 이상윤, 장채근 등 해태 코치진이 ‘원장님, 장어구이로 몸보신 좀 합시다’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나주 내 고향에 있는 농장 잔디밭에서 달 밝은 밤에 때 아닌 장어구이 파티가 벌어졌다. 그 때 얼큰히 주기가 오른 김성한. “원장님! 원장님 때문에 내 선수생활이 쬐금 빨리 끝났거든요. 어떻게 보상해 주실라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원장님 때문에 제가 빨리 은퇴했잖아요. 그러니 보상해 줘야죠.” 뚱단지 같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나와 김성한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건 도대체, 술김인지 아니면 맨 정신에서 나온 소리인지 진의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어쨌기에 은퇴가 빨라졌다는 거야. 팔꿈치 수술을 권유했다고?” “아니요.” “그럼?” “제가 88년에 팔목이 부러졌잖아요.” “그래서?” “그때 제가 술 먹으면 안되냐고 물어봤지요?” “그래.” “그때 원장님이 한잔은 괜찮다고 했지요.” “그랬던가, 한잔이야 괜찮았겠지.” “바로 그겁니다. 술 한 잔은 괜찮다고 하시길래 술이 뼈 부러진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가 보구나 해서 계속 술을 먹었지요.” 어차피 게임에 나가지 못할 노릇이니 김성한은 술이나 마시자 하여 매일 술을 마셨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면 몸이 빨리 나빠지지 않아 선수생활을 더할 수 있었다는 투였다. “맨맡한 년은 제 서방굿도 못 본다더니, 너 지금 나 돌팔이 만들어놓고도 부족해서 이제 보상까지 운운하냐?” 모두가 배곱을 쥐었다. 어느 덧 중천에 솟아오른 달이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그날 밤은 주치의와 선수가 아닌 좋은 친구들 간의 수작(酬酌)으로 그렇게 깊어만갔다. 해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성한(왼쪽)과 이순철(사진 제공 KB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