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닭’ ‘팔색조’.
조계현의 별명이다. 별명 마따나 조계현은 여느 투수와는 다른 데가 많았다. 투수 마운드에 우뚝 서있는 그의 눈을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의 장닭이다. 공 하나하나에 불이 붙어있는 것 같고, 폭풍우 같기도 하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조계현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출신이다.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 조계현에게 얽힌 일화다. 군산상고를 졸업할 무렵 그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당시 해태 코치였던 백기성 씨와 김응룡 감독, 이상국 부장 그리고 나 넷이서 군산엘 갔다.
프로야구가 탄생하기 전 고교야구가 한창 인기를 구가했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군산이 전국에서도 내노라하는 야도(野都)였던 때의 얘기다. 그 시절 백기성 씨는 군산상고 감독을 하면서 전국대회 우승만 몇 차례 거머쥐었던 주인공으로 군산시민들의 우상적인 존재였다.
네 사람이 탄 자가용은 곧게 뻗은 전주-군산 간 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렸다. 한참 기분 좋게 드라이브를 하며 군산 초입에 들려는데 교통경찰이 차를 세우는 게 아닌가. 과속이었다.
순간, 백기성 씨가 문을 열었다.
“수고하십니다. 저 군산상고 백기성….”
말이 떨어지자마자 교통경찰의 오른손이 눈 위로 올라갔다. 경례를 부치면서 그는, “군산에는 웬일이데유. TV에서 자주 뵙구먼유”라며 사족(蛇足)까지 덧대는 것이었다.
식당엘 가도, 거리를 걸어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이구 백감독님’을 연발했다. 시쳇말로, 요즘 잘 나간다는 ‘HOT’나 ‘안재욱’은 저리 가라였다. 숫제 붕붕 날아다녔다.
그런 백 감독이었는데, 조계현의 스카우트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원래 이북 출신인 조계현의 부친은 많은 자녀들을 뒀는데 모두 마음먹은 만큼 교육을 시키지 못해 조계현이만큼은 꼭 대학교육을 시키겠다는 ‘한풀이’ 때문이었다. 결국 조계현은 그 해 연세대학으로 훌훌 날아가 버렸다.
조계현이 해태에 입단, 붉은 유니폼을 입고 ‘싸움닭’으로 명성을 날린 것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의 얘기다. 그가 해태를 명문구단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중의 한명이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1996년 시즌이 시작될 무렵 야구장에서 계현이를 만났다.
“계현아, 금년에는 몇 승이나 할 것 같냐?”
“해봐야지요. 한 12~13승 하지 않겠어요.”
“그건 말이 안 되지. 최소한 15승은 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면 좋지만 그게 쉽게 되는 겁니까?”
“좋아, 그럼 나하고 내기하자. 15승 하면 내가 지고 못하면 계현이 니가 지는 거다.”
“아이고, 원장님. 14승으로 하죠.”
“야! 1승 가지고 쫀쫀하긴.”
“아닙니다. 1승이 14승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어서….”
“여하튼 내기하는 거다.”
“좋습니다. 15승으로 하지요. 그런데 내기 내용이 뭡니까?”
“이기는 사람 마음대로.”
그 후 조계현은 1승을 보탤 때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준비하십시오”하면서 으름장을 놨다. 그러면“내기에서 내가, 게임에서는 네가 이겼으면 하는 게 솔직한 기분이다.”라며 ‘양다리 걸기’식으로 대꾸했다.
어려운 상황이 많았지만, 그 해 조계현은 15승을 달성했다.
“원장님, 내기에 졌으니 뭔가가 있어야죠.”
조계현은 승자의 호기를 한껏 부렸다. 그러나 나는 패자이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무렵, 외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귀국하면서 사온 T-셔츠 하나를 내밀었더니, 머리를 꾸벅거리고는 빙그레 웃었다. 이듬해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서 또 계현이를 만났다.
“금년에도 내기하는 겁니다.”
“좋지, 올해도 15승이다.”
“아이고, 제 나이도 있는데 1승만 덜죠.”
“무슨 소리! 나는 이미 한번 패했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1997년 시즌 조계현은 선발 15승은 이루지 못했지만 세이브 포인트까지 합친 끝에 또 승자가 됐다. 그 후 이 시즌이 끝나고 해태는 우승권에서 멀어지고 말았는데 새삼 조계현이와의 내기가 마음 끝을 스쳐간다.
임채준(전 해태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2007년 11월, 2008 베이징올림픽 대표팀이 12월 대만에서 열릴 아시아 예선전을 앞두고 전지훈련을 벌인 오키나와 온나 아카마 구장에서 조계현 투수코치가 박찬호의 어깨 근력 훈련을 도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