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돌팔이다!-해태 주치의 회고록](10)해태버스가 불타던 날
OSEN 기자
발행 2008.01.22 10: 12

(10)지우고 싶은,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해태버스가 불타던 날 1986년 10월 22일, 대구구장에서 열렸던 해태와 삼성의 한국시리즈 3차전은 지금도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 가운데 하나다. 아니,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아야 할 기억이 아닐까 싶다. 그 날 아침. 내 자가용으로 한대화와 이순철, 선동렬을 태워 대구까지 후송한 탓인지, 아니면 김 감독의 ‘환영’ 탓인지 어렵던 경기를 가까스로 이겼다. 물론 그날의 수훈갑은 이들 세 명이 아니라 차영화였다. 크건 작건 경기를 치르다 보면 유독 미치는 선수가 있기 마련인데 그날은 차영화가 그랬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해태는 이긴 탓인지 파티 분위기였다. 경기 도중 관중들이 선수들에게 쓰레기를 던져도, 경기가 끝난 후 ‘무서운’ 관중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덕아웃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어도 어려운 경기를 이긴 탓에 선수들의 마음은 새털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그 순간. 최윤범 해태구단 매니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타났다. 뭔가 불길함을 예고하고 있었다. “부,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나다니? 어디에?” “구단버스에 불이 났습니다.” 당시 대구 관중이 흥분한 것은 이전 광주 게임 도중 일부 관중들이 던진 물병에 삼성 진동한 투수가 머리에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기실 현장을 지켜본 의사로서 판단된 바로는 경기를 못할 정도의 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침 투수를 교체해야 했는데, 관중들 눈에는 물병에 맞아 교체한 것처럼 보였다. 그 광경을 TV로 지켜보던 대구 관중들의 심사가 오죽했겠는가. 게다가 다시 3차전에 등장한 진동한 투수가 마운드에 있는 상황에서 만루가 되었고 타석에는 덩치 큰 장채근이 서게 되는, 마치 시나리오 같은 상황이 발생했으니 대구 관중들은 광주 1차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김응룡 감독이 뚜벅뚜벅 걸어가 장채근을 불러 무어라고 일담을 나누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김 감독은 사실 일년 가야 한 번도 타석에 선 선수에게 간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자 대구 관중석이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쓰레기가 날고, 경기가 속행돼도 그 상황이 이어졌다. 분위기는 흉흉했다. 거기다 장채근이 볼넷으로 밀어내기 한 점을 얻게 되니 관중석은 기름에 성냥 긋는 형국으로 변했다. 그렇게 끝낸 게임이라 관중이 다 퇴장하면 선수들이 돌아갈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시간까지도 가지 않던 관중 일부가 해태 구단 버스가 눈에 보이자 야유, 흥분하다 결국 방화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방화범은 결국 잡히진 않았다. 다만 버스는 삼성구단이 수리해주기로 하고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바깥에 서있던 버스가 불이 붙었다고 해도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서운’ 관중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채 공포에 휩싸인 선수들에게 나라도 뭐라고 말을 건네야할 판이었다. “야, 채근아. 아까 느그 감독이 타임 걸고 너에게 뭐라고 하던, 맞으라고 했제?” 일부러 사투리까지 덧대며 장채근에게 농을 걸었다. “아니요, 그냥 앞으로 바짝 붙으라고만 하시던 데요.” 몇 회인지 기억은 없지만, 상황은 만루. 상태투수는 언더핸드의 진동한이었고 타자는 0.1톤이 넘는 장채근이었다. 타석을 고르는 장채근을 김 감독이 불러 귀엣말을 한 장면을 되돌리며 걸었던 농이었다. 푸풋-.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고, 백지장 같던 얼굴들도 제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차영화를 바라봤다. “영화야. 네가 친 홈런 말이야. 이지플라이 같던데, 운 좋게 넘어갔지?”했더니, “무슨 말씀입니까? 원장님. 오늘은 볼이 저 달만하게 보이던데요”라고 여유 있게 넘기는 게 아닌가. 김종모도 옆에 있었다. “종모야. 너 요사이 여자 만난다더니, 너는 볼이 저 달처럼 안 보이고 탁구공처럼 보이냐”라고 놀렸더니, “걱정 마십시오. 저는 스타체질 아닙니까? 서울게임에서 끝내줄 겁니다.”라고 한층 능글맞게 받아넘겼다. 한참 뒤 숙소로 돌아온 나는 호텔 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찬 하늘에는 차영화가 친 홈런볼이 둥그렇게 떠있는 것처머 보였다. 흥보네 안방풍경처럼, 덕아웃에서 모포를 줄레줄레 뒤집어쓰고 긴장을 털어 내던 그 추억은 아직도 보름달로 남아있다. 과열팬들이 남겨준 쓰라린 생채기와 함께….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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