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돌팔이다!-해태 주치의 회고록](16)이강철, 무릎과의 투쟁으로 얻은 10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OSEN 기자
발행 2008.02.01 17: 20

(20)이강철, 무릎과의 투쟁으로 일궈낸 10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오랜 세월의 무게 탓인가. 이강철이 삼성으로 이적한 후였던 지난 2000년 잠깐 죽을 쑤는 것을 보니,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언더핸드드로형으로 처음으로 기록한 10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와 세 자릿수 탈삼진(1989~1998년)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야말로 한국야구사에 길이 남을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대기록은 한마디로 무릎과의 투쟁이 빚어낸 눈물겨운 역사다. 이강철은 대학(동국대) 시절 오른쪽 무릎의 내측 반월상 연골파열 수술을 받았다. 고행의 시작이었다. 해태 입단 후에도 전방십자인대가 완전치 못해 매년 페넌트레이스를 하면서 이따금 무릎 통증에 시달려야 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고질화될 정도였다. 진흙 속에 핀 연꽃이 차라리 아름답다고 했던가. ‘안정성 없는 무릎’ 때문에 부실한 다리로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웠고, 그 기적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 승리’ 자체였다. 기적은 뼈를 깎는 자기관리를 통해 이뤄졌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1998시즌을 마치고 이강철이 나를 찾아왔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전방십자인대의 손상으로 인한 슬관절에 불안정 현상이 있기는 했지만, 1999년을 무사히 넘기면 FA선수가 된다는 들뜸 때문이었으리라. 1999년 하와이 스프링 캠프를 맞는 그의 눈은 표범의 그것에 가까웠다. 잠깐, 내가 하와이 캠프를 들렀을 때만 해도 몸을 단련하느라 매일 파김치가 되어 숙소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먼저 귀국한 내게 좋지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강철의 무릎에 이상이 생겨 조기 귀국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이강철이 내 진료실을 찾아왔다. “어떻게 된 거냐?” “의욕이 넘쳤나 봐요. 올 한해 정말 잘 해볼 욕심으로 열심히 훈련했는데 무릎에 통증과 불안정 현상이 심해져 도저히 훈련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하와이에 갔을 때 왜 말하지 않았냐?” “그 때만 해도 견딜 만해서….” 이강철의 무릎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릎의 내부연골이나 인대에 이상이 있으면 대퇴부 사두박근 중 무릎주위의 내측근육이 위축 되는데 이강철의 안쪽 근육에 이미 심한 위축증상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전방십자인대 검사를 해보니, 인대기능이 거의 0상태로 나타났고 내측 반월상 연골 손상증상도 보이고 있었다. “MRI 사진을 찍어봐야겠다.” “수술해야 합니까?” “결과를 보고 이야기 하자.” 예상했던 대로 MRI에는 거의 닳아 없어진 전방십자인대와 뒤쪽 부위가 찢어진 내측 반월상 연골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겠는데, 한국에서 할 것인가 미국에서 할 것인가는 본인이 결정해야 해.” 한 달 가까이 이곳 저곳을 둘러본 이강철이 다시 찾아왔다. 미국에서 하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미국 산호세의 트리브 박사에게 급전과 함께 이강철의 MRI 사진을 보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1999년 4월19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두 시간 남짓 진찰을 마친 끝에 이강철 본인의 인대를 이용한 전방십자인대 성형수술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인대를 이식할 것인가를 놓고 트리브 박사와 나의 의견이 분분했다. 수술비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 머뭇거렸지만, 결론은 쉽게 후자로 모아졌다. 마음씨 좋은 트리브 박사가 자기 수술비를 디스카운트 헤서 다른 사람의 인대를 사서 수술 하자는 것이었다. 땡큐, 땡큐! 4월20일 수술을 끝내고 22일 이강철과 함께 귀국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탑승시간을 기다리는 이강철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수술한지 이틀 만에 다리를 내돌리고 있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백분(白粉) 바른 것처럼 하얀 얼굴이 아예 납덩이처럼 싸늘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탑승기간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이건 정말 죽을 맛이었다. 주치의가 아니라 시중꾼이 안 될 수 없었다. 진통제를 먹이고 한숨을 돌리려는 참인데 대한항공 직원이 지나갔다. 다짜고짜 소매를 붙들고 상황을 설명했더니, VIP룸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침대에 이강철을 눕힌 뒤 무릎을 위로 올리고 얼음찜질을 해댔다. 그제서야 이강철의 얼굴이 좀 펴졌다. “휴~. 강철아, 나중에 몸이 회복돼 운동을 하더라도 오늘의 상황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이고 십 년 감수했다. 이놈아. 병원을 떠난 의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죄송합니다.” 그 때서야 태평양이 그렇게 넓은 것을 처음 알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옆에서 가슴 졸이는 나야 그래도 참을 만 했겠지만, 이강철의 태평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10배는 넓었을 것이다. 그 이강철이 삼성으로 이적을 한다니 마음 한구석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삼성에 가서도 특유의 언더드로로 타자들을 꾹꾹 눌러줬으면 했다. 굳이 기록에 집착할 게 아니라 앞으로도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정상적인 몸으로 은퇴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2005년 어느 날 우리병원 외래 진료실 간호사가 “교수님, 이강철 선수는 지금 나이가 몇인가요?” 하고 묻는다. “왜 그러는데.” “교수님, 저희 고등학교 다닐 때 해태 이강철 선수인데, 지금도 기아에서 선수 생활하데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전화해서 몇 살이냐 물어 볼까?(웃음)” 이강철은 2006년 4월 12일, 광주구장에서 은퇴식을 갖고 한국 최고의 잠수함투수 전설로 남았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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