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한국 최초의 ‘노히트 노런’ 주인공 방수원의 항명사건 방수원이라면 우리나라 프로야구사상 최초로 노히트노런(1984년 5월 5일)의 대기록을 남긴 투수다. 그 방수원이 어느 게임에서 잘 던지다가 위기를 맞이했다. 김응룡 감독이 ‘타임’을 걸고 마운드로 향했다. 김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가면 필경 투수교체라는 신호다. 쓰다달다 아무 말도 없이 김 감독이 손을 쑥 내민다. 방수원에게 공을 달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순하디 순하게 생긴 방수원이 공을 뒤로 감추면서 몇 발자국 물러 나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이 마운드에서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선수가 감독을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투수교체의 작은 소동이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덕 아웃에서 이 해프닝을 지켜보고 있던 구단 관계자와 코치, 선수들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예감했다. 결국 이날의 사건은 방수원의 1군 엔트리 탈락으로 ‘매조지’된다. 설상가상, ‘별명이 있을 때까지 운동장에 나오지 말라’는 불호령이 덧대졌다. 감독에게 항명할 경우 그럴 수도 있다고 볼만한 상황이었지만, 해태에는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언제 해태 투수진에 여유가 있었던가. 김응룡 감독의 마음이 언제 풀릴 것인가. 현장에 있던 나는 김 감독이 화가 많이 나 있을 때는 혼자 풀게 하는 것이 나을 듯해 일찍 야구장을 빠져나왔다. 이튿날 아침 박정일 코치가 나를 찾아왔다. 당시에는 광주 금호아파트에 김 감독을 비롯, 김인식, 박정일 코치가 함께 기거하고 있을 때다. 전날 저녁 최윤범 매니저가 “원장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라며 전화를 했는데 내가 “무조건 내일 아침에 김 감독 숙소를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게 해라”고 일러둔 뒤였다. 박 코치는 “오늘 아침에 방수원이 감독 숙소로 찾아왔는데 들어오지도 못하게 내쫓아버렸다”고 전하며 수습책을 물어왔다.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대신 방수원에게 연락해서 1군 선수들이 훈련하기 전에 일찍 나와 땀 흘리는 모습을 김 감독에게 보여주고 도망가라고 전해주세요.” 그날 정오께, 김 감독이 점심이나 하자며 찾아왔다. 아무 일도 없는 양 김 감독의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갈까?” “나주곰탕이나 먹으러 갑시다.” 굳이 광주 시내 음식점을 마다하고 나주행을 고집한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이었다.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던 김 감독이 이윽고 입을 뗐다. “어제 게임 봤소?” 짐짓 시치미를 떼며 “못 봤는데, 무슨 일 있소?”라고 묻자, “허참, (방)수원이가 말이요.”라며 김 감독이 열을 내며 상황 설명을 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게 다요?”라며 무심한 척 툭 건넸다. “그 게 어디 보통 일이요?” “뭐가 보통 일이 아니요?” “아, 글쎄.” 내가 김 감독의 말허리를 잘랐다. “혹시 선동렬이 그랬다면 몰라도 방수원이 그랬는데 그렇게 신경이 쓰이요? 사소한 일에 신경 쓰다가는 건강 버립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나 합시다.” 내 의도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김 감독은 방수원을 1군에 복귀시키지 않았다. 선수들의 항명에 대한 조치는 지금도 지켜지는 김 감독만의 ‘불문율’인 것 같다. 사실, 김 감독이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경우도 많지만 야구에 관한 한 그의 옹고집은 유명하다. 때문에 자존심을 다칠 정도로 서로에게 깊숙이 관여하지 않는 것도 둘 사이의 ‘불문율’이고, 그런 태도가 20년 우정을 유지케 한 것이다. 그러나 방수원을 언제까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1987년 4월 17일 대구에서 열렸던 삼성과의 경기 때였다. 2연전을 치르느라 힘을 뺐는데 2차전은 스코어가 18-14가 될 만큼 치열했다. 양팀 투수진이 바닥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때 문득 방수원을 투입하면 승리를 거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정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오자 김 감독이 나를 찾아왔다. “이번 대구게임의 2차전은 핸드볼 스코어입디다.” “타자들이 점수를 내서 뒤집으면 투수가 곧바로 점수를 내주니 낸들 무슨 재주로.” “그건 그렇고 그 때 방수원이를 투입했으면 어땠을까.” 슬쩍 김 감독의 옆구리를 찔렀다. 방탄복을 입었나, 김 감독은 “술이나 합시다.”라며 비껴간다. 그러나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김 감독과 헤어진 뒤 최윤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내일 아침 방수원이 운동장에 나가서 땀 많이 흘리고 연습을 하다가 김 감독을 보면 인사만 하고 도망가라고 해.”라고 다시 말했다.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하는 선수를 가장 좋아하는 김 감독의 ‘약점’을 이용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김인식 코치에게 전화를 걸어 “방수원을 용서해주라고 부탁말씀을 해달라.”고 또 하나의 장치를 해뒀다. 그 후 방수원은 다시 1군 엔트리에 들어가게 됐다. 버거운 살림살이에 어느 선수건 아쉽지 않으랴만, 김 감독의 ‘불문율’에는 시기와 명분이 기본이었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