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김응룡 감독과 함께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이야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1983년 해태가 처녀우승을 한 그 해 6월 28일 홈런타자로 명성을 날리던 김봉연이 여수에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일행 중에 사망자가 생길 만큼 대형사고였지만, 다행히 김봉연의 상처는 가벼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봉연의 ‘간판’이었다. 얼굴이 찢어진 포장지처럼 망가져 버린 것이다. 당시 전 전남대병원 성형외과 과장이던 최석현 박사가 밤샘 수술을 통해 ‘짜깁기’를 시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내기에 이른다. 그래서 요즘도 김봉연을 만날 때면 의학의 놀라운 발전과 인체의 복원력에 감탄을 느낄 때가 많다. 어쨌든 김봉연은 코밑 흉터를 감추기 위해 콧수염을 기른 채 경기에 출장, ‘코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봉연의 교통사고가 난지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점심 무렵에 김응룡 감독과 최윤범 매니저가 점심이나 하자면서 진료실을 찾아왔다. 그날따라 김 감독이 내 차를 운전하려고 했다. 일행은 김 감독의 승주농장을 둘러보고 나주에 들러 ‘나주곰탕’을 먹을 요량이었다. 교통사고가 많기로 이름난 ‘광목(광주-목포)간 도로’를 내달렸다. 그런데 울퉁불퉁한 도로를 막 넘어서는 순간, 경운기 한대가 앞을 가로막는 게 아닌가. 김 감독이 급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왼편으로 꺾었다. 차는 반대편 차도로 돌진, 가드레일을 들이받더니 겨우 멈췄다. 일행은 겨우 정신을 수습해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뜻밖에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나는 차량에서 얼굴을 내미는 운전자들이 한결같이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저렇게 차가 왕창 망가지는 사고를 당하고도 뭐가 좋아 웃을까. 견인차를 불러 차량을 처리하고 일행은 가던 길을 고집했다. 웬만한 심장 같으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마저 아득할 일 아닌가. 그럼에도 셋은 나주곰탕을 맛깔스럽게 먹었다. 정오뉴스에서는 교통사고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 감독, 세상 참 재미있네. 만약 우리가 죽었든지 크고 작든 상처라도 입었다면 뉴스깨나 탔을텐데 말이요.” “그럼, 이 곰탕이 제삿밥? 하이고.” 내 스스로 생각해봐도 불과 수 시간 전에 황천입구까지 다녀온 사람들치고는,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성 싶었다. 광주에 돌아오니, 언론사 등 여러 곳에서 전화깨나 온 모양이었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이 언론사에 제보했는데 기자들이 ‘김 감독이 어디에 입원했느냐’며 물어왔다는 얘기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 감독이 부른다. 다짜고짜 차를 타라는 것이었다. “어디 가?” “가면 알아.” 광주 신양파크호텔 골프연습장으로 들어간 김 감독. “임 원장, 신발 몇 mm짜리 신어?” “왜 그래?” “골프화 사야지.” “아니, 갑자기 골프는?” 그러나 김 감독은 막무가내다. 되레 2개월분 회비와 레슨비까지 지불한다. “이제 골프 배울 때도 됐지 않아?” “누구 좋으라고? 내가 김 감독 들러리할 일 있어?” 며칠 전 핸들을 잡았다가 사고를 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가 보다. 경위야 어찌됐건 나는 그 사고로 인해 골프에 입문하게 된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가운데), 서종철 총재(오른쪽)와 함께 자리한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