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김일권의 항명파동 야구팬들의 야구 즐기기는 그야말로 입맛대로다. 시원한 홈런타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타자를 쥐 잡듯 압도하는 호랑이 같은 투수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나처럼 섬세하거나 재치 있는 플레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프로야구사의 기록에 한 획을 그은 김일권을 많은 야구팬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도(大盜)’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베이스를 많이 훔쳤고, 그런 그의 야구를 보러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으리라. 내 개인적으로도 선수 시절의 김일권과 참 많은 인연을 맺으며 지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김일권은 개성이 강한 선수였던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일견 내성적이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바위처럼 엄격했고, 스타의식도 대단했던 걸로 기억한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날 외출은 커녕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또 늘 전자계산기를 가지고 다니며 자신의 타율을 체크할 만큼 야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선수였다. 우리 집에 초청을 받았을 때 다른 선수가 먼저 방을 차지하고 있으면 토라져 바로 돌아가 버릴 정도로 ‘소유욕’도 남달랐다. 물론 이런 성격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트러블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해태에 재일교포 출신의 박정일 코치가 있었는데 박 코치 역시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탓에 가끔 부딪치곤 했다. 주위 사람들과 이런저런 갈등은 조창수 코치와의 불화로 발전, 결국에는 일을 내고야 말았다. 어느 해 대전 원정 게임 도중이었다. 조 코치와의 불화를 김응룡 감독이 알게 되면서 예의 그 불같은 성격이 휘둘려졌다. 결과는 김일권의 광주행. ‘항명’에 따른 김 감독의 긴급조치였다. 큰 일 났다 싶어 대전으로 올라갔다. 김 감독, 코치들과 식사를 하면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다시 광주로 내려와 김일권을 만났다. 양쪽의 입장 다 나름대로 그럴만했다. 김 감독의 선처로 ‘김일권의 항명파동’은 짧은 기간 안에 일단락됐다. 그러나 터지지 않은 화약고처럼 늘 잠복해 있었다. 어느 날, 나와 김응룡 감독, 김인식 코치가 저녁을 먹을 때였다. 예의 잠복해있던 김일권 얘기가 나왔다. 다음은 김 감독의 인분(人糞), 곧 ‘똥’에 관한 지론. “먼저 나온 똥은 나중에 나온 똥에 항상 눌리기 마련이요. 이제 일권이도 항상 출장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먼저 나온 똥), 마음 느긋이 먹고 후배(나중에 나온 똥)들을 가르치고 다독거려 코치 수업을 받아야할 때야.” 김인식 코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며칠 후 김일권이 야간경기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나를 찾아왔다. “김인식 코치가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모르겠는데요.” 퍼뜩 김 감독과의 저녁식사 장면이 떠올랐다. 넌지시 김일권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나 김일권의 생각은 확고했다. 선수생활을 더 하겠다는 것이다. 해태에서 선수생활을 할 수 없다면 다른 팀에 가서라도 하겠다는 각오였다. 결국 김일권은 1988년에 태평양 돌핀스로 옮겨가 1989년과 1990년 2년 연속 도루왕을 거머쥘 만큼 선수생활을 열심히 한 뒤 코치까지 올랐다. 지금도 김일권 하면, 3루에서 홈슬라이딩 도루를 성공시키고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후배를 배려하는 김 감독의 마음이나, 나름대로 선수생활을 오래 지속하려던 김일권의 치열한 태도가 새삼 그립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