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돌팔이다!-해태 주치의 회고록](26)김응룡 감독 부친의 별세-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OSEN 기자
발행 2008.02.27 14: 57

(26)김응룡 감독 부친의 별세, 고향이 그리워 그렇게도 눈을 못 감으시더니…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다. 살다보면 얼굴도 습관도, 마음씨까지도 닮아간다. 그래서 어느 한편이 먼저 세상을 뜨면 다른 한편은 금세 힘을 잃는 경우가 흔하다. 김응룡 감독의 부친도 ‘삶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내시다가 모친이 세상을 뜬지 10년 만에 뒤를 따라가셨다. 부친의 외모는 김 감독과 국화빵이다. 두 분이 함께 서면 부자를 구별하지 못할 만큼 건강한 육덕(肉德)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나 부인을 먼저 여읜 뒤 기력이 차츰 쇠약해진데다 지병인 기관지천식이 심해져 병원을 드나드는 회 수가 점차 늘어났다. 기관지천식이란 게 기후에 굉장히 민감해 어느 때는 금방이라도 큰일을 당할 것만 같아 김 감독이 부친을 등에 업고 응급실로 내달린 일도 많다. 그러나 10년이라는 모질지만, 오랜 세월을 견뎌내신데는 북에 두고 온 고향을 불씨처럼 늘 간직하고 살아온 터였으리라. 급기야 김 감독은 1998년 6월21일 전주경기 도중 부친의 비보를 접했다. 김 감독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부친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 가운데서도 유독 부친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탓에 함께 이산가족이 된 것은 물론이려니와-1.4후퇴 시 잠깐 피난인 줄 알고 평양에 따라가 전차를 타보고 싶어서 아버지를 따라나선 것이 영원한 이산 가족이 되고 말았다- 붙박이 해태 감독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러있을 수 있었으리라. 아마선수 시절 다른 팀으로부터 스카웃 유혹이 있을 때면 김 감독의 선친은 “살 수 있는 집이 있고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밥이 있으면 운동과 돈을 연결하지 말고 한군데서 열심히 운동하라우.”라고 제동을 거는 그런 분이었다. 한일은행 야구부에서 21년, 해태에서 18년의 장구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부친의 인생관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기실, 이런 선친의 인생관은 김 감독에게 그대로 전수됐으며 그로 인해 김 감독의 야구인생 또한 많은 변화를 맞곤 했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감독 물망에 오르는 인사들을 대상으로 미국 연수기회가 있었다. 몇몇 인사들의 경우 소속팀의 동의를 얻지 못해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김 감독은 한일은행에서만 20여년 ‘봉사’의 반대급부로 은행장으로부터 시원시원한 승락을 받아 1년 연수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고 한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당시 6개 팀으로 출발했다. 호남을 연고지로 한 해태의 창단 감독은 김동엽 씨였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는 인기를 등에 업고 프로야구 감독자리에 오른 김동엽 씨는, 그러나 기인에 가까운 성격 때문에 끊임없이 잡음을 일으켰고 결국에는 중도에 지휘봉을 놓고 말았다. 조창수 감독대행으로 첫 시즌을 마친 해태 박건배 구단주가 연수차 미국에 있던 김응룡 감독을 직접 찾아가 러브콜을 했고 이후 18년 세월동안 해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감독은 해태에서 V-9과 함께 각종 기록을 남기며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의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또한 김 감독의 선친이 남겨 주신 값진 자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 감독 선친의 산소는 전남 승주군 고인돌 공원 근처의 감나무 농장에 있다. 생전 아들과 함께 감나무를 일궜던 곳이다. 그러나 비록 육신은 지하에 묻혀있지만, 선친의 영혼은 여전히 고향의 하늘을 떠돌고 있으리라. 그의 선친이 화장을 원치 않았던 이유를 나는 안다. 언젠가 고향에 묻힐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라는 것을.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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