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김응룡 감독 어머니의 별세, 걱정 했던 그날이…머피의 법칙 김응룡 감독의 고향은 평양 근처다. 남북 이산가족인 셈이다. 지금 기억에 설이나 추석명절이면 그의 뒷모습은 늘 쓸쓸했던 것 같다. 워낙 감정표현을 자제하는 천성 탓에 뭐라고 말 붙이기도 머쓱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1989년 어느 날 술자리에서 “뭣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남으로 내려왔어?”하고 물었더니, “솔직히 말해 평양에 가서 전차를 타본 기억이 있는데, 아버지를 따라가면 전차를 탈 수 있다는 생각에 무작정 따라 나선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전차를 타려다, 거기에 누님 한 분까지 끼어 ‘남행열차’를 타게 됐다는 기가막힌 얘기였다. 김 감독의 누님은 출가해 사시다가 일찌기 타계하셨고, 아버님 역시 새 어머니를 맞았다. 그런데 이 어머니가 늘 혈압이 높은 탓에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김 감독은 원정경기에 나설 때면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급히 연락해 달라’며 내게 신신당부하곤 했다. 홈경기 때는 임종을 놓칠세라 승용차 안에서 밤을 지새는 경우도 많았다. 하루는 “김 감독, 어제 병원에서 내게 연락이 왔던데 어디서 잤어?”하고 물으니, 피곤해서 차에서 잠깐 쉰다는 것이 그만 밤을 새고 말았다는 것이다.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어느 날 저녁 술자리에서 원정을 앞둔 김 감독의 마음을 다독였다.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 금방 돌아가실 것 같다가는 다시 좋아지니.” “큰 걱정은 마시오. 닥치면 다 하는 게 그거 아뇨? 그런데 이상한 예감이 들어. 어머니께서 잘 버티다가 큰 게임 때 일 당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글쎄, 그 때까지 어떻게 될지 걱정이오.” “이러다 한국시리즈 때 초상 치르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걱정 반 농담 반으로 보낸 적이 있다. ‘그 날’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기어코 일은 터지고 말았다. 1989년 빙그레 이글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게 됐다. 10월26일 대전구장에서 열리는 1차전을 앞두고 김 감독이 그라운드에 나가 있는데 어머니께서 영면하고만 것이다. 이런 걸 머피의 법칙 이라 하는가? 나는 부리나케 김 감독 집으로 달려갔다. 김 감독의 부인인 최여사와 장례절차 등을 상의했다. 고민에 빠졌다. 김 감독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하나 마나. 그러나 최여사와 논의 끝에 김 감독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페넌트레이스라면 몰라도 한국시리즈를 감안한 어려운 결정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차전 결과는 패배. 상가(喪家)는 더욱 침울함에 빠졌다. 1차전이 끝나자 이튿날 아침 해태 노주관 사장이 김 감독에게 모친의 사망소식을 전하고 광주에 내려왔다. 노사장과 장례, 화장 절차 등 의논을 마치고 시내 한식당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면서 TV로 2차전을 관전했다. 1차전에서는 첫 숟갈을 뜨려는데 철썩 같이 믿었던 선발 선동렬이 1회에 이강돈에게 선두타자 홈런을 내주더니 끝내 0-4로 지고 말았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선동렬이 초장부터 두들겨 맞았으니 2차전도 불길했다. 거 참, 불행은 혼자 오는 게 아니라 했던가. 아니나 다를까 2차전도 선발 조계현이 1회에만 4점을 내주며 힘겹게 경기를 이끌어갔다. 그 순간 상주 노릇을 해야할 김 감독의 마음은 어땠을까. 마치 내일인 것처럼 가슴이 북받쳐왔다. 평소 김 감독의 효성이 지극했음일까.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2차전에서 질질 끌려가던 게임을 해태 타자들이 분발, 기어코 뒤집기에 성공해 6-4로 역전승, 당초 기대대로 1승1패를 꿰맞출 수 있었다. 선수단 버스가 곧바로 상가에 도착하자, 한껏 우울했던 분위기가 마치 난장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김 감독의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과 선수들의 환대를 받으며 하늘나라로 가셨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