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돌팔이다!-해태 주치의 회고록](33)김응룡의 가방에는 항상 ‘영어, 일어사전이 들어 있었다’
OSEN 기자
발행 2008.03.19 10: 36

(33)해태 타이거즈 주치의가 된 사연. 나는 어렸을 적부터 운동과는 거리가 먼 왜소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 당시 유일하게 라디오로 운동중계를 듣던 시절, 특히나 야구중계는 정말 좋아했다. 그 시절 내가 좋아하던 선수가 시원한 홈런을 날리던 우타자 김응룡, 좌타자 박영길, 그리고 유격수 하 일, 철통같은 수비를 자랑하던 3루수 강병철, 이런 선수들은 지금은 모두가 지인이 됐지만 기실, 나는 그 사람들을 라디오중계 때문에 좋아했고 그래서 친숙한 사이처럼 느꼈다. 1982년 9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 김재박의 절묘한 번트나 한대화의 꿈같은 역전 3점홈런으로 일본을 이기고 한국이 우승하던 쾌감 같은 것도 느껴보았다. 그런데 1982년 봄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우리지역을 연고로 한 해태 타이거즈가 탄생하게 된다. 이들이 창단해 훈련하던 모습 등을 눈여겨보면서 광주구장에서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의 경기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 나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 때 나는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기실 광주 무등경기장 야구장에는 야간조명 시설이 없어 오후 2시에 야구를 시작하면, 욕먹을 짓이었지만 나는 야구장으로 달려갔다. 관중석에 앉아서 야구를 보면서 사람들이 환자는 안보고 왜 여기 와 있느냐고 놀리기도 하여 외야 한 구석에 숨어서 관전하기도 했다. 당시 창단 감독이었던 고인이 된 김동엽 감독, 조창수 코치, 유남호 코치 등과 이따금 만나서 술 잔을 기울이기도 하였는데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의 야구장에서 기인적인 행동도 즐거웠다. 다른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시즌 중에 김 감독이 물러나고 조창수 감독대행체제로 운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즈음 미국에 유학중이던 김응룡 감독이 우리 해태 타이거즈에 감독으로 영입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만의 바람이 아니고 구단이나 코치 선수들이 모두가 바라던 바였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건배 구단주의 미국행으로 전격적으로 김응룡 감독이 시즌이 끝날 무렵 해태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자연히 코치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어 이야기를 하던 중 김 감독이 미국에는 정형외과 의사가 팀주치의를 하는데 우리팀을 맡아줄 수 없느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당시 나는 주치의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야구장에 명분있게 가게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주치의를 수락하게 된다. 주치의 생활 19년 동안을 회고해 보면 큰 목적도 없이 입문하게 되면서 기실 막연히 의사이니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으나 회고해 보면 파란만장한 세월이었고 꿈같이 즐거운 시간도 많았지만 나와는 이해 관계 없이 괴로워서 술도 먹고 경기장에서 못 피우는 담배를 연속 피워대는 안타까운 시간도 많았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라고 하니 병원과 환자는 내 팽개치고 야구장에만 매달려 있는 줄로 알고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당연히 환자들에게 불평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20여년의 세월을, 그것도 남자로서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절이었던 4, 50대를 보낸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보다는 보람된 세월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그간의 해태구단 임원들이나 감독, 코치 등과의 인연도 나의 또 다른 세계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청소년 시절에 우상이었던 김응룡 감독과 20년 세월을 넘게 우정을 나눈 것도 내 일생에서는 커다란 행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세월 동안 김 감독과의 생활에서 나는 그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하고 정확한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느끼고 김 감독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최고는 절대 우연이 없다는 하나의 철칙 같은 생각도 하게 되었다. 보통 운동선수라면 치고 받고 달리고 이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알겠지만 김 감독의 가방에는 항상 영어 사전과 일본어 사전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전지훈련이나 장기간 원정경기 다녀온 후에는 그 가방 속에는 국내 베스트셀러나 월간 시사 잡지 등이 들어 있어 그 가방의 무게가 책의 무게로 더해져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긴 시간을 같이 지내며 서로를 아는 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식사주문 하는 것만 봐도 ‘오늘은 누가 돈을 내겠구나’하는 것을 알 정도로 둘의 대화가 통해서 좋은 친구를 한 명 얻은 기분이었다. 파란만장한 세월 중에 주치의를 그만두려고할 때마다 김 감독은 “내가 해태에 있는 한 도와줘야 한다”고 못을 박았는데 그가 떠난 날까지 그 옆에서 친구로서 주치의로서 내일을 다 했는지 궁금하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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