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해태 선수단의 독특한 분위기 새 천년에 들러서자 한국 프로야구의 최고 명가 해태 타이거즈가 침울한 분위기에 빠졌다. 매각설이 현실화 된 것이다. 프로스포츠가 없던 시절, 호남은 물론 우리나라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해태 구단이 공중분해 일보직전이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해태 앞에 ‘꼴찌’라는 수식어가 붙어버린 것도 기가 막힌다. 김성한 감독이 부임하면서 명가재건을 외치고 나섰지만, 분위기는 썩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해태의 전력이 우승권에서 멀어질 무렵 유남호 코치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해태 창단코치였던 유 코치는 도중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가 미국유학을 다녀온 뒤였다. “원장님, 꼴찌 팀은 역시 꼴찌데요.” “야구 못하면 꼴찌지, 뭐” “야구 못하고 잘하고가 문제가 아녜요. 정신상태가 문제더라구요. 제가 해태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게임에 지고 나면 팀 분위기가 가라앉다가도 이내 선수들이 코를 씩씩거리며 경기를 되씹어보곤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지금은 어떤데?” “아니 글쎄, 몇 연패(連敗)를 하고도 버스를 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심각성을 모르더라구요. 버스 안이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요.” “뭐라고?” “기가 막히더라구요.” 우승권에서 멀어진 허탈감 때문일까, 아니면 모기업 도산에 따른 신분의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아무쪼록 일과성 현상일 뿐, 엉뚱한 패배의식이 선수들 마음을 사로잡지나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유 코치의 말을 듣노라니, 갑자기 조재환이 떠오른다. 몇 년 전 대구에서 삼성과의 게임이 있었다. 좌익수 조재환이 수비 중 판단미스로 타구를 놓쳤다. ‘만세’를 불러 좌중월 안타를 만들어준 것이다. 주자일소 3루타로 이어져 결국 해태가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물론 많은 게임을 치르다보면 특정 선수 때문에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조재환이 숙소를 이탈해버린 것이다. “야! 너 어디 갔다 왔냐?” 며칠 뒤 복귀한 조재환을 붙들고 물었다. “정말 죽고 싶데요. 그래서 무조건 버스를 타고 동해안으로 갔는데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더라구요.” “야, 임마. 야구선수가 에러 한번 했다고 죽으면 선수 한 명도 남아나지 않겠다.” “에이고, 중요한 게임이었잖아요. 내가 잘 했으면 이길 수도 있었을 텐데. 원장님도 아시겠지만 게임에 지면 이동하는 버스 안의 분위기가 그렇잖아요.” “그래. 너희들의 그런 기분과 분위기가 해태 우승의 원동력이었어. 야, 임마, 힘내.” 적어도 V-9을 일구고 난 직후까지 해태의 분위기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게임에서 지면 일시적으로 우울했지만, 패배는 곧바로 새로운 게임에 대한 의욕으로 반전될 수 있었다. 지금 KIA가 해태 시절처럼 강자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그 때의 분위기를 되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