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해태 타이거즈는 정말 사랑받는 팀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어서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한 많은 군사독재 시절에 해태 타이거즈로 인해 호남인들이 울분을 풀었고, 그 경기 결과에 따라 하루의 대화, 기분이 좌우되기도 했다. 해태가 정말 인기 있던 시절, 광주 무등구장에서 야구가 있는 날이면 비단 광주뿐만 아니라 호남 전역 유흥업소 매상에 영향이 있을 정도였다. 이따금 시내에서 유흥업소 업주를 만나면 “해태 때문에 장사 망하겠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면, 싫지만은 않는 분위기였다. 목포, 순천, 여수 등지에서 버스를 빌려 야구 구경을 오던 시절을 생각하면 운동장에서의 선수들의 경기 내용도 물론 중요했겠지만 운동장에서의 함께 하는 한풀이도 한 가지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내가 다니던 전남대 의과대학병원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신경외과 우정현 교수님이나, 지금은 은퇴하시고 시골서 살고 계시는 안과 박병일 교수님, 또 마취과의 하인호 교수님 등 의사 처지로는 대 선배이시고 스승이시던 옛 선생님들이 행여 골프장 코스에서나 사석에서 만나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 분들도 야구팬으로 돌아가 누가 잘못하면 ‘그 친구는 왜 그런다냐’, 누가 잘해서 경기를 이겼으면 ‘참 그놈 예뻐 죽겠다’고 하시면서 의사 제자인 나를 상대로 야구 이야기를 꽃피우시던 것을 생각하면 최고의 지성인인 호남인들로부터 일반 샐러리맨에 이르기까지 진정으로 해태 팀을 사랑했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의 모닝커피 시간에 일단 화두는 전날 밤 해태 경기 결과였고 사무실 분위기도 좌우할 정도였다. 이긴 날이면 스포츠지나 조간신문을 서로 보려고 경쟁이 일어나지만, 지는 날이면 어떤 데스크의 비서가 신문을 올려놓다가 상사로부터 신문치우라는 투정을 받기도 하는 분위기였다. 어느 지방지 기사에 실린 이종범의 파인 플레이 소식을 접하게 되면 ‘그래 너 보는 재미로 산다’고 할 정도로 사랑받는 팀이었다. 어느 해 해태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해 그 날 김응룡 감독과 나는 일부러 한국시리즈 텔레비젼 중계를 보지 않으려고 식당으로, 술집으로 배회한 적이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현상을 보았다. 길에서 만난 아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김 감독 손을 잡으며 “김 감독님, 힘 내십시요. 내년에는 또 우승 해야지요”하면서 위로하는 것을 보면 타이거즈는 우리 지역에서 아낌없이 사랑받는 팀이었다. 아울러 감독과 선수들은 당시 우리들의 우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광주지역 주요 일간지였던 광주일보의 김종태 회장이 나와 각별한 사이가 된 사연도 사실은 야구 때문이었다. 야구는 좋아하는 사람의 정도에 따라 즐기는 정도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승패에 기준을 두고 좋아하기도 하고 서운해 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경기를 보면서 자기가 투수가 되어 ‘아, 이럴 때는 이런 볼을, 또 이 선수에게는 이런 볼을 던져야 되는데’ 하면서 야구를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그것은 곧 제 생각과 투수의 생각이 일치하였을 때의 즐거움과 제 생각과 다른 볼을 던지거나 안타나 홈런을 얻어맞으면 ‘에이 참’하며 서운해하는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무슨 구질의 볼이 올 텐데, 꼭 쳐야 할 텐데, 이번에는 기다려야 할 텐데’ 할 정도로 자신이 타자가 되어 야구를 하는 대리 만족의 즐거움과 낭패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감독이 되어 이때는 번트다, 아니 이때는 히트 앤드 런이다 하는 등 작전을 생각하며 제 생각과 감독의 생각이 일치해 작전이 성공하면 즐거워하고 그렇지 못하면 감독을 욕(?)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앞서 말한 김종태 회장은 이 모든 사항을 다 즐기는 분이었다. 야구계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지만 광주 지역 야구 선수들뿐만 아니라 전국 야구선수들의 중·고 시절 성장과정도 잘 아는 분으로서 야구를 보는 관점이 또 다른 면이 있다. 선수들이 학교 시절부터 야구하는 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특히 광주일고선수들은 선수 개인의 신상뿐만 아니라 가족 사항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고 계시셨다. 이 선수들이 성장하여 프로야구에 입문해서도 항상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고 확인하는, 호남야구의 대부였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그 외에 내가 알고 있는 사업가들, 그리고 학교 선후배인 의사들, 모두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야구를 지켜보았다는 것은 내 스스로 항상 감사하고 추억 속에 남는 일이 되고 있다. 연재를 마치며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용기를 얻어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회고록을 써보기로 마음 먹게 됐습니다. 막상 써보려 하니, 그간 준비를 해둔 자료나 기록도 별로 없고 막연히 기억을 되살려 쓸수도 없어, 수 없이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유달리 나를 아껴주시고 야구를 좋아 하셨지만 유명을 달리하신 전 광주일보 김종태 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분에 넘친 격려로 지난 날들을 회상하고 KBO 프로야구 역대 연감을 뒤적이며 날짜를 확인하고 경기 내용을 되짚어 보면서 써내려갔습니다. 어느 네티즌의 지적처럼 술자리에서의 이야기거리 정도밖에 되지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인의 40~50대를 함께한 자랑스러운 해태 타이거즈 야구단 선수 여러분과 임원 여러분들을 다시한번 생각하고 음미할수 있었던, 마냥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1980~90년대의 프로야구 열기와 함께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해태 구단의 뒷이야기가 팬들의 마음에 애틋한 사랑과 추억의 시간이 되셨으면 한결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이제 4월이면 2008년 페넌트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열립니다. 보다 많은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프로야구가 되고 특히 KIA 타이거즈 선수 여러분들은 선배들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이어 받아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팀을 만들어주기를 빌어 봅니다.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못다한 남은 이야기들은 좋은 기회에 책으로 엮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글의 연재 제목인 <그래, 나돌팔이다> 라는 부제를 붙여주신 전모신문사 문화부장님과 정리의 수고를 해준 OSEN에 이 기회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성원을 보내주신 누리꾼 여러분, 고맙습니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사진=한국야구위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