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일, 부산 사직구장에선 롯데와 SK의 시즌 2차전을 앞두고 작은 소동이 일었다. 경기개시 1시간 전에 교환된 타순표에 이름이 올라있던 정근우가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근우는 숙소에서 야구장으로 출발한 팀 동료들과는 달리 특타를 위해 인근 학교로 갔던 것인데, 훈련을 마치고 경기장으로 오는 도중 도로가 교통체증으로 꽉 막히는 바람에 졸지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정근우는 경찰의 도움을 빌어 간신히 시간 안에 경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편 정근우가 나타나기 전까지 팀 관계자와 KBO는 그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대책회의에 들어가야 했다. 이날 정근우의 포지션은 2루수. 만일 정근우가 경기개시 전까지 도착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SK는 다른 선수로 대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부에서는 출장 예정인 선수가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몰수게임이 아니냐는 과격한(?)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선수부족으로 인한 몰수경기 선언 규칙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야구규칙에서 말하는 선수부족으로 인한 몰수경기는 9명의 선수를 경기장 안에 내세우지 못했을 경우다(규칙 4.17). 선발 라인업에서 미 도착 사유로 결원이 생긴 경우는, 당일 출장선수 명단(26명)에 들어있는 다른 선수로의 대체가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선수 수 부족 규정을 들어 덮어씌울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 뒤늦게 도착할 정근우의 당일 경기 출장은 도의상(?) 힘들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얘기는 오고 갔다. 미 도착 선수가 발생한 구단에 그 정도의 페널티는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와 같은 주장의 주요 골자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문서화된 규정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회의 도중 여기서 또 하나의 가지가 뻗었다. ‘정근우가 만일 지명타자였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알다시피 지명타자는 반드시 한 타석의 타격을 완료해야만 교체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과거 태평양의 하득인이나, 해태의 박철우처럼 자기 파울타구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마네킹처럼 타석에 그대로 서서 삼진을 당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덕아웃으로 들어갔던 해프닝이 일어난 것도 바로 그런 규칙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듯 중요한 위치(?)인 지명타자가 경기 전에 도착을 하지 못했다면? 이날 정근우를 조치하려 했던 방침대로 지명타자를 다른 선수로 바꿔서 그대로 경기를 진행 시키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야구 규칙상 지명타자는 상대선발 투수가 바뀌지 않는 한, 적어도 첫 타석에서는 대타를 기용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도착을 하지 못한 지명타자 대신 다른 선수로의 교대를 인정한다면 이는 대타를 쓰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따라서 곤란하다. 그러면 다른 방법은? 해당 팀의 당일경기 지명타자를 소멸시켜야 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그 팀은 그날 지명타자 제도를 사용할 수 없다는 얘기다. 선발투수가 지명타자 타순에 올라가야 한다. 지명타자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리그 안의 경기에서 어느 한 팀만 지명타자를 쓸 수 없다면 공격력의 열세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의 불이익은 어쩔 수 없는 일. 감수해야 한다. 그러면 지명타자는 없어졌다고 치고, 늦게 도착한 지명타자는 나중에라도 대타나 수비로 경기에 참가할 수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서 이미 거론한 것처럼 뛰게 해서는 안된다. 단, 공식기록 처리상으로 보면 이런 논리도 모순이 생기긴 한다. 실제 경기에서 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이미 경기에 출장했다 물러난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인데, 미 도착으로 경기에 빠진 경우는 공식기록상 경기에 출장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나중에라도 경기에 나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될 것 같기도 하지만, 도의상으로도 그렇고, 상대 투수에 따라 선수를 슬쩍 바꿔치기 하는 꼼수를 미연에 막아보자는 예방차원의 문제 때문에라도 당일 경기에는 미 도착 선수를 결장시키도록 하는 것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