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구원승 결정기준은 현재 진화 중(상)
OSEN 기자
발행 2008.06.03 14: 39

“승리투수까지 주는 것은 걔를 두 번 죽이는 일 이예요.” 2년 전쯤이었던가, 구원승을 누굴 줘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다 쉽사리 답이 나오질 않아 구단에 넌지시 의향을 물었는데, 그 때 돌아온 대답이었다. 당시 리드시점을 갖고 있는 투수였지만 투구내용이 썩 좋질 않아 승리투수로 기록하기가 영 내키지 않던 참이었는데, 그런 시점에서 들려온 농담(?)과도 같은 그 한마디는 앙금 같던 번민을 한번에 털게 해준 한 마디이기도 했다. 지난 5월, 구원승 결정에 있어 리드시점을 갖고 있던 구원투수가 승리투수 결정에서 연달아 물을 먹는(?) 일이 발생하자 기록에 관심을 갖고 있는 팬들과 야구관계자들의 지적과 문의가 잇달았는데, 이에 대해 기록원이 그렇게 판정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과 정황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어 구원승과 관련된 긴 얘기를 꺼내보려 한다. 올 시즌 구원승과 관련된 이의제기의 단초는 5월 24일, 잠실에서 열렸던 LG와 KIA의 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KIA의 7번째 구원투수였던 오준형(24)은 팀이 11-13으로 뒤지고 있던 7회말 2사 만루의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 한 타자만을 상대(플라이볼)하고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하게 된다. 곧 이은 8회초에 KIA는 3점을 뽑아내며 경기를 역전(14-13) 시켰고, 더 이상의 난전은 못 봐주겠다는 듯, 8회말에 접어들자마자 전담 마무리 한기주(21)를 조기 등판시켰고, 한기주는 기대에 부응하는 투구를 선보이며 남은 2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는데 성공, 장장 5시간에 걸친 대 혈전(정규이닝 최장시간 신기록)에서 마침내 승자로 남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리드시점을 갖고 있던 오준형이 아니고, 세이브로 생각했던 마무리 한기주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팬들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물론 그렇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생각이다. 오준형이 투수로 있을 때 팀이 역전을 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승리투수 결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는 ‘리드시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리드시점을 보유하고 있는 투수를 승리투수에서 제외시킬 수도 있다는 근거가 규칙엔 엄연히 명시되어 있다. ‘리드시점을 갖고 있는 구원투수라 하더라도 일시적이거나 비효과적인 투구를 하고, 뒤에 나온 투수가 리드를 유지하는데 더 효과적인 투구를 했다고 기록원이 판단했을 경우에는 나중에 나온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를 기록한다’ 라는 내용(10.19)이다. 이날 오준형이 추가 실점의 위기에 나와 잘 막아낸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단지 한 타자만을 상대하고 경기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이닝이 아직도 2회(8, 9회)나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시적으로 볼 수도 있다. 더욱이 당일 경기흐름이 나오는 투수마다 난타를 당하는,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흐름으로 전개되어 갔다는 사실로 볼 때, 남은 2이닝 동안 어떤 돌발변수가 발생할 지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단 한 점의 불안한 리드상태에서 마운드에 올라와 2이닝 동안 상대를 완벽하게 틀어막은 한기주의 투구는 이날 KIA의 승리에 있어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한 타자를 상대하고 물러난 오준형이 자기 팀이 적시에 역전을 시킨 덕분에 행운의 1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눈감아 주기엔 경기 흐름상 한기주의 활약이 너무나 돋보였던 하루였다. 가정이지만, 오준형이 8회말에도 마운드에 올라와 한두 명의 타자를 더 잡아냈다고 한다면 ‘일시적’이라는 예외조항의 핸디캡도 깨끗이 털어내며 시즌 첫 승의 기쁨을 누릴 수도 있었다. 결국 이날 오준형과 한기주의 차이는 ⅓회와 2회라는 투구 이닝상 숫자만큼의 차이도 있겠지만, 심정적으로 경기 내용에 있어서의 영향력과 비중의 차이가 수치적 크기보다도 훨씬 더 커 보였기 때문에 승리투수 결정에 있어 기록원이 한기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원승리 투수를 결정하는데 있어 그 선택을 놓고 완전히 다른 길로 갈라지는 경우, 그 원인을 들여다보면 이론과 현장의 충돌이 빚어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는 리드시점을 가진 투수가 당연히 승리투수로 기록되는 것이 맞지만, 현장에서 경기의 흐름을 처음부터 쭉 지켜본 기록원의 눈에는, 때에 따라서는 기록지에 숫자나 이론으로 나타나지 않는 그 무엇이 더 부각되어 보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과거엔 리드시점만 갖고 있으면 투구 이닝이나 내용에 관계없이 그 구원투수를 가급적 승리투수로 기록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식기록 역시 이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야구적인 관점으로 현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기록이 되기 위해 규범과 규칙의 큰 틀을 깨지 않는 범위내에서 가능한 한, 많은 변화와 노력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구원승 결정기준 역시 지금 그 변화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다음에는 구원승과 관련한 또 하나의 다른 사례를 중심으로 구원승 결정 기준의 미묘한 인식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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