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끝나고 난 뒤, 이날 경기를 맡았던 1루심은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이런 말을 남겼다. “갑자기 캄캄해지더라고.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해”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1994년의 얘기다. 때는 4월 20일. 대구에서는 삼성과 해태의 시즌 두 번째 맞대결이 열리고 있었다. 해태는 5-2로 앞서 있던 7회에 선동렬을 투입했고 경기는 그렇게 싱겁게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믿었던 선동렬이 9회에 집중 6안타를 맞으며 무려 4실점이나 할 줄이야. 9회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스코어는 졸지에 6-6으로 변해 있었다. 안 그래도 개막전 이후 2승 6패로 궁지에 몰려있던 해태로선 심기가 더욱 불편할 수밖에. 9회말 1사 1루 상황에서 삼성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타석에는 선동렬의 공을 가장 잘 쳐낸다는 평가를 받던 김성래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김성래는 유격수 머리 위로 어정쩡하게 날아가는 내야 플라이성 타구를 날리는데 그쳤고, 당연히 잡힐 것으로 판단한 1루주자 양준혁은 2루쪽으로 향하려다 되돌아 1루로, 김성래는 타구를 한참 쳐다보다 천천히 1루로 향하는 그림이 전개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유격수 이종범은 아무도 예상치 않았던 기지를 발휘했다. 자기 앞으로 떨어지는 플라이 타구를 바로 잡지 않고, 타구가 땅바닥에 한번 튀기기를 기다렸다가 짧은 바운드로 주워 1루수에게 송구(결과적으로 유격수 땅볼)를 했던 것이다. 평상시처럼 1루를 밟은 상태에서 유격수의 송구를 받은 1루수 김성한(해태)은 1루에 서 있던 양준혁을 서둘러 태그한 후, 의기양양하게 1루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1루심은 1루주자는 아웃이 아니라며 손사레를 쳤고(맞는 판정이었다), 김성한은 재차 태그하는 시늉을 하며 1루심에게 한번 더 생각해 볼 것을(?) 요구했다. 잠시 후, 1루심은 다른 심판원과 몇 마디를 주고 받은 뒤 김성한의 의도대로 1루주자 양준혁까지 모두 아웃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삼성으로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상황. 삼성의 우용득 감독을 비롯한 코치들이 우루루 1루심에게 달려들었고, 이미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기준을 준비하지 못했던 1루심은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몇 분의 시간이 경과한 뒤, 삼성에 설득(?) 당하고 만 1루심은 재차 내렸던 판정을 번복하는 결정을 하고 말았다. 타자주자만 아웃이고 1루주자 양준혁은 아웃이 아니라는…. 이번에는 해태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판정번복에 대해 강력히 어필했지만 설득력 부족(?). 이러한 일련의 홍역을 치르느라 중단된 경기 시간은 무려 15분. 경기는 이후 연장전으로 접어들었고, 밤 10시 30분 이후 새로운 이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시간제한 규정에 걸려 6-6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10회를 끝으로 판을 접어야 했다. 다음날, 1루심은 판정을 두 번이나 번복하는 해프닝을 일으킨 죄로 5경기 출장정지와 제재금을, 주심은 1루심의 구원(?)요청에 틀린 조언을 해준 댓가로 역시 제재금을 부과 당하는 페널티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종범이 애초에 노린 것은 1루주자 양준혁과 타자주자 김성래. 하지만 이종범의 잔꾀에도 양준혁은 무탈할 수 있었고 정작 더블아웃은 애꿎게도 1루심과 주심이 몫이 되고 말았다. 당시 1루심은 1000경기가 넘는 출장수를 기록하고 있던 다름아닌 조장이었다. 경험이 일천하다면야 그럴 수도 있다 하겠지만, 베테랑 심판임에도 왜 그런 일을 겪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판정에 필요한 공식을 외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규칙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번 안경현의 여우수비 때 설명했던 것처럼 3T(주자먼저 태그아웃)-3A는 무조건 더블아웃이 인정되지만, 3A(타자주자 먼저 아웃)-3T는 주자가 1루에 붙어있는 이상 아웃이 되지 않는다는 공식말이다. 야구규칙이 복잡하다는 것은 그만큼 일어날 수 있는 돌발상황의 경우의 수가 많다는 반증이다. 평소에는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현장에서, 눈앞에서 일이 벌어지면 긴가 민가 하게 되는 것이 야구규칙이 갖고 있는 속성이다. 당황하면 아는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단순한 공식뿐이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