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지난 11월 15일 세이부(일본) 라이온즈와 텐진(중국) 라이온즈 전 종료 후, 2008 아시아 시리즈에서 심판으로 나설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장비를 주섬주섬 챙기던 한국 심판원에게 다른 나라의 심판원이 “내일 다시 경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아직은 남아 있다”라는 말을 건네왔을 때만 해도 이 말은 유머에 다름 아니었다. 만에 하나 결승전에 한국이 올라가지 못할 경우, 한국 심판원이 제3국의 심판 자격으로 파이널 경기의 주심과 2루심을 맡아야 하는 상황을 돌려서 한 말이었다. 최 약체로 분류된 중국전에서도 다 진 경기를 천신만고 끝에 건져낸 대만과 최강 일본(4-3)과 중국(15-0, 7회 콜드)을 연파한 한국의 일전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로부터 3시간 남짓 뒤인 오후 6시 정각에 시작된 SK 와이번스(한국)와 퉁이 라이온즈(대만)의 초반 경기흐름은 예상대로였다. 2회초에 이진영(SK)이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선제 솔로홈런을 때려냈을 때만해도 한국의 결승행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운명의 4회말, 1-1 동점상황에서 대만의 7번타자 리우푸아호(劉芙豪)에게 불의의 3점홈런을 허용하며 스코어는 1-4로 벌어졌고, 한국의 기록석과 기자석은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이 패할 경우, 한국과 대만 그리고 일본이 모두 2승 1패가 되는 까닭에 실점 공방률로 순위를 가려야 하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쓸모 없던(?) 휴대용 계산기를 꺼내 3팀의 총 실점수와 수비이닝을 더해가려던 순간, 대만 8번타자의 솔로홈런이 연이어 터졌고, 설상가상으로 5회말 또다시 홈런을 추가로 내주며 스코어는 창졸간에 1-6으로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한국은 다행히도 6회초에 대만의 엉클어진 외야수비 덕에 2점을 만회, 3-6으로 점수를 좁히는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대회규정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작년까지 아시아 시리즈의 대회규정은 예선에서 2팀 이상이 동률일 경우, (1) 해당 팀간의 경기에서 승리한 팀 (2) 총 실점수가 적은 팀 등의 순으로 순위를 가렸지만, 이번 2008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총 실점수가 적은 팀’에서 ‘총 실점률이 낮은 팀’으로 그 기준이 바뀌었는데 바로 이 부분이 한국팀에게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뜻 보면 실점수로 따지나 실점률로 따지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이 생각될 수 도 있겠지만, 속내를 파고드니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 채택된 총 실점률에는 3팀 간의 공방률 외에도 중국전의 결과를 합산해서 계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국이 공방률 계산에 골몰해 있던 당시의 스코어인 3-6 상태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총 실점수에서는 대만과 같은 -9점이지만, 총 실점률에서는 0.375로 대만(0.346)에 뒤져 3위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중국전에서 기인한다. 한국은 중국전에서 15-0의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때 거둔 콜드게임이 되레 한국팀에 불리한 쪽으로 작용을 하고 있었다. 실점률 계산에서 수비이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실점률이 낮아지게 마련인데, 한국은 중국전에서 수비기회를 7이닝 밖에 갖지 못해 대만(26이닝)보다 2이닝이 적은 24이닝으로 실점률 계산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같은 실점수임에도 대만보다 높은 실점률이 나왔던 것이다. 바꿔 말해 중국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콜드게임승을 거둔 한국이나 일본보다 9회말에 가서야 중국에 간신히 역전승을 거둔 대만이 공방률 게임에서 훨씬 유리한 처지에 서게 되는 모순된 현상이 생겼다는 말이다. 콜드게임승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부정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물론 수비이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실점기회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약체를 상대로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강 팀의 경우, 수비이닝 수에 비례해서 실점수가 늘어날 확률은 별로 높지 않다. 아무튼 이러한 부분이 순위다툼에서 한국에 불리한 작용을 하고 있음을 떠올리며 심난한 마음을 달래고 있던 차에 8회초, 1점을 더 따라붙어(4-6) 굳이 실점률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2점차 이내로 SK가 점수차를 줄여놓자 비로소 한국 진영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지만 다행스런 마음도 잠시, 돌아선 8회말 SK는 또다시 7번타자 리우푸아호(劉芙豪)에게 치명적인 이날 경기 두 번째의 3점홈런을 얻어맞으며(4-9) 결국 회생불가의 길로 들어섰고, 공식기록석 앞에 모여 자존심(?)도 잊은 채 결승행을 향한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꼽아가던 한국 진영도 열심히 두들겨 대던 계산기를 손에서 내려놓아야 했다. 세이부(일본)와 퉁이(대만)의 결승전이 열린 다음날(16일), 궁금한 마음에 순위 가름이 실점수에서 실점률로 바뀐 이유가 따로 있는지를 퍼시픽리그 기록부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실점수보다는 실점률을 반영하는 것이 보다 더 타당성 있는 방법이라고 보여집니다. 단순한 숫자의 덧셈보다는 확률로 계산했을 때의 수치가 그 팀의 수비능력을 더욱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대답은 두루뭉수리 간단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점수라는 것은 말 공격팀이 앞설 경우, 9회말 수비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수비기회가 동등치 않는 등의 형평성 문제를 안고 있는 규정이다. 반면 이닝당 실점 확률은 수비이닝의 차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순을 덮어 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번처럼 약 팀에 콜드게임승을 거둔 전력(前歷)이 순위 다툼에서 거꾸로 해(害)가 되는 꽤나 야속한(?) 현상만큼은 아시아 시리즈를 떠나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