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에서 주자에게 ‘무관심 도루’(정확한 표현은 무관심 진루-Indifference advance)를 처음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이다. 그 이전부터도 이미 야구 규칙서 안에는 상황에 따라 주자의 도루시도를 무관심 진루로 기록할 수 있다는 조항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선뜻 나서서 주자의 도루기록을 뺏어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소식을 통해 무관심 진루가 이미 메이저리그에서는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규칙이라는 사실을 접하면서 국내에서도 무관심 진루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경기 중 상식적인 매너를 지키지 않았을 때 터지곤 했던 선수간의 빈볼과 몸싸움이었다. 점수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인데도 자신의 도루 기록을 늘리기 위해 무방비 상태에서 쪼르르 다음 루를 훔치는 파렴치한(?) 행위가 빈볼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으로 떠올랐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의 하나로 무관심 진루의 적용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속에 손에 방울을 쥐고 고양이 앞에 서야 했던 공식기록원들의 심적 부담이 생각보다 컸던 것일까? 무관심 진루를 적용하기로 했던 첫 해에는 공식기록원들의 눈치보기(?)로 달랑 1개의 무관심 진루(삼성 이승엽)만이 기록되었지만, 사문화(死文化)되다시피 했던 10.08 (g) 항의 무관심 진루조항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2003년 이후부터는 매년 20개를 전후한 무관심 진루(14-26-29-18-29개)기록이 매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2008시즌이 끝나고 난 뒤, 집계된 무관심 진루기록은 전과 비교해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일반적인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였다. 그간 매년 기록되어 오던 평균치의 두 배도 넘는 59개(올 시즌 삼성의 팀 도루 숫자와 동일)가 잡힌 것으로 나타났고, 더욱이 2군에서 기록된 무관심 진루기록 수 69개와 합치면 무려 128개에 달해 있었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최근 들어 국내프로야구의 흐름은 기동력의 야구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불과 2, 3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팀들은 번트를 비롯한 작전에 의한 야구를 선호해왔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다. 대부분의 팀들이 뛰는 야구로 돌아섰다. 뛰는 야구라 해서 꼭 도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타성 타구를 쳐놓고도 상대가 조금의 틈만 내보이면 지체없이 2루를 파고들려 하고, 주자로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가능성이 보이면 주저 없이 뛴다. 그러다 보니 과욕에 의한 견제사나 주루사도 빈번이 일어나긴 하지만, 팀에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결과를 책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최선을 다했다는 쪽으로 밀어주는 모양새다. 2007년 8개 구단이 기록한 총 도루수가 764개였던 것이 2008년에는 987개로 대폭 증가했다. 현재는 126경기지만 130경기 이상을 소화했던 1999~2004년 사이에 기록되었던 최다 도루수가 934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그 만큼 뛰는 야구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여기에 무관심 도루로 기록된 59개를 보태면 1046개다. 과거 프로야구 역대 최다 도루는 1991년의 1014개다. 올 시즌이 사실상 역대 최고 기록인 셈이다. 당시에는 무관심 진루가 없었으니까. 따라서 무관심 진루 폭증의 해석 역시 전체적인 도루시도 빈도수의 급증현상 안에서 풀이가 가능하다. 다음의 이유는 ‘크게 지고 있어도 갈 수만 있으면 간다’는 식의 플레이 형태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크게 이기고 있는 팀에서 뛸 때는 문제가 되겠지만, 리드를 당하고 있는 처지에서의 진루시도는 상대의 감정을 자극할만한 이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별다른 제제 없이 진루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시즌 1군에서 기록된 59개의 무관심 진루 모두가 리드를 당하고 있는 팀에서 기록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팀 최다 도루 1위 팀인 두산의 올 시즌 무관심 진루 기록이 ‘0’ 이라는 점이다. 뛸 때는 뛰지만 필요 없는 상황에서는 안 뛰었다는 얘긴데, 팀에서 추구하는 바인 ‘뛰는 야구’ 속에도 나름의 행위이론을 정립해놓고 플레이를 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개인별로는 안치용(LG)이 4번으로 최다, 박재홍(SK)과 클락(한화) 등이 3번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또한 무관심 진루는 대부분 7회 이후에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딱 한차례 5회에 무관심 진루로 기록된 예가 보인다. 1-14로 리드 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1루에서 사라져버린 주자가 있었다. 양준혁(삼성)이다. 그런데 올 시즌 기록된 무관심 진루 기록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재미있다는 생각 너머로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무관심 진루를 정의하자면 ‘수비측의 무관심을 틈타 주자가 다음 루로 진루 한 것’을 말한다. 이 규칙의 제정 의도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주자의 플레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비례해서 무관심 진루라는 기록 역시 성격상으로 상당부분 무의미한 기록일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깊은 고민이 들어있다. 선수들의 플레이가 무의미한 행위로 기록되는 일이 남발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이다. 처음 이 제도를 시행하려 했을 당시, 현장의 코치와 각 구단 기록원들의 의견을 상당부분 반영하려 애썼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기고 있는 팀에만 국한시켜야 한다, 이닝 종반에만 적용해야 한다, 점수차는 몇 점차까지 인정할 것인가, 볼카운트에 따라 적용을 달리해야 한다, 도루왕 타이틀을 바라보는 선수의 무관심 진루는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1루수를 비롯한 야수의 움직임과 위치 해석은? 등등…. 그 동안 안팎으로 수 차례 검토 되어왔던 내용들이다. 논의를 바탕으로 한 기록원들이 갖고 있는 적용기준도 이미 정립되어 있는 상태지만 지금처럼 무관심 진루기록이 한 해에 100회를 넘어서는 일은 분명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뛰는 야구, 점수차에 상관없이 열심히 하는 야구가 낳은 무관심 진루기록의 폭증 현상에 대해 기록원들이 한번쯤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때인 듯 싶다. 적어도 지금처럼 뛰는 야구가 계속되는 한…. 윤병웅 KBO 기록실장 온라인으로 받아보는 스포츠 신문, 디지털 무가지 OSEN Fun&Fun, 매일 3판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