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이치로의 ‘사이클링 내야땅볼’, 정수근이 한 수 위
OSEN 기자
발행 2009.03.07 15: 38

2009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 개막일인 지난 3월5일, 아시아 라운드 1차전에서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36)가 중국을 상대로 기록한 4개의 내야땅볼에 뒷담화가 만발이다. 야구의 내야땅볼이란 것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전혀 귀하지 않은 현상임에도 화제로 떠오른 이유는 다름아닌 이치로가 친 땅볼타구의 방향이 골고루 분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치로는 첫 타석 1루수 앞 땅볼을 시작으로, 3루수-2루수-유격수 앞 땅볼을 차례로 기록하며 그의 특기인 부채살 타법(?)을 유감없이 선보였는데, 이를 두고 현지에서 조롱적인 의미에 가까운 ‘사이클링 내야땅볼 히터’라는 표현을 갖다 붙인 것이다. 비록 한 경기였지만 타격감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시종 허우적대는 이치로가 8회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왕이면 투수 앞 땅볼을 때려냈으면 하는 장난끼 섞인 기대가 살짝 일기도 했다. 만일 투수 앞 땅볼까지 기록한다면 정말로 보기 드문 내야땅볼의 모든 경우를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전부 맛보게 되는 희귀한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치로의 타구는 무심하게도 2루수 머리 위 높이 날아 올랐고, 사이클링 내야땅볼 보다도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는 ‘올 마이티(전지전능) 내야땅볼’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으로 끝나버렸다. 그런데 이치로가 6회말 네 번째 타석에서 유격수 앞 땅볼을 기록하며 사이클링 내야땅볼의 결실(?)을 이뤄낸 순간, 슬쩍 이치로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되는 국내 선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정수근(롯데)이다. 정수근이 2001년 7월 16일, 잠실에서 열린 그 해 올스타전서 동군의 선두타자로 나와 상대 팀인 서군 내야수들에게 마치 수비연습을 시키기라도 하듯, 1루수 앞 땅볼(1회)을 시작으로 2루수(2, 4회), 3루수(6회), 유격수(8회) 앞 땅볼을 순서대로 때려내며 5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현상만 놓고 보면 단연 기능상 감이었다. 이치로와 당시 정수근이 기록한 사이클링 내야땅볼은 그 내용은 같지만 급수에서는 정수근이 한 수 위다. 이치로는 땅볼의 순서가 중간에 뒤바뀌어 나왔지만 정수근의 경우에는 1루수-2루수-3루수-유격수 순으로 차례대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순도가 다르다. 그 동안 정규시즌에서도 이러한 경우가 있긴 있었겠지만 당장 정확하게 잡히는 기억은 아직 없다. 이런 기록들은 비록 하찮게 취급되는 영양가 제로의 땅볼에 관한 기록들이지만 연습이 아닌 실전에서 그러한 기록을 접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야구에서 내야땅볼로 간주될 수 있는 해당 포지션은 모두 6개다. 기존 4명의 내야수 외에 투수와 포수가 처리하는 땅볼도 모두 내야땅볼로 분류된다. 한술 더 떠 타자가 하루에 타구를 처리한 야수의 번호(1에서 6까지)가 전부 다른 땅볼타구를 모두 기록하는 일도 상상해볼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현상이나 결과를 놓고 생길 수 있는 현상을 골고루 이루어내는 일을 빗대어 스포츠계에서는 ‘사이클링’이라는 말을 곧잘 인용한다. 대표적인 ‘사이클링 히트’는 공식적인 야구용어로 뿌리를 내린 지 이미 오래다. 이치로가 만들어낸 사이클링 내야땅볼은 공식적인 야구용어는 아니지만, 야구에서 생겨나는 가십성격의 기록들을 쉽게 표현해내는 또 다른 부류의 야구용어다. 비슷한 예로 ‘중전 적시투’라는 말도 있다. 흔히 찬스에서 때려내 득점을 올리게 되는 경우, 타자의 안타를 적시타라는 말로 바꿔 부르고 있는데 이를 차용해 지어낸 말이다. 포수가 2루주자를 견제하기 위해 던진 공이 악송구가 되어 중견수쪽으로 빠지는 바람에 주자가 홈까지 들어왔을 때에 갖다 붙인다. 부수적으로 포수에게는 타점이 아닌 ‘투점’을 올렸다고 놀려댄다. 야구에는 공식적인 야구용어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멋진 야구용어들이 참으로 많지만, 이처럼 익살스런 표현을 이용해 상황을 대신하는 재야의 용어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야구란 잘하면 잘하는대로 못하면 못하는대로 그 구석구석에 자리한 잔재미들이 여기저기에서 새록새록 배어 나오는, 참으로 복잡 다양한 운동이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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