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6일 일본 야구대표팀의 스즈키 이치로(36)는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로 장소를 옮겨 치러진 2009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 2라운드 1차전(대 쿠바전)이 끝나고 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 대표팀은 수비력이 좋은 팀이어서 수비에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불과 이틀 뒤 2라운드 1조 승자끼리 맞붙게 된 한국전에서 일본은 이치로의 입과 얼굴이 무색할 만큼 정교하지 못한 수비 실수를 거듭 저지른 끝에 시작부터 3실점,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양 팀의 경기 스타일상 그 어느 때보다도 선취점과 기선제압이 중요했던 경기였음을 감안하면 승패의 저울은 이미 1회초에 그 균형을 완전히 잃었다고 봐도 무방한 경기였다. 일본이 닻을 채 끌어올리기도 전인 1회초의 대량실점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다. 그것도 홈런 등, 불의의 일격이 아닌 수비난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의외다. 파워를 내세우기보다 치밀하고 세밀한 기술야구를 자랑하는 일본이 아니었던가!. 1회초 일본이 저지른 실책은 공식적으로는 단 1개뿐이다. 무사 1, 2루 김현수의 땅볼 때, 2루수 이와무라의 송구를 잡다 빠뜨린 가타오카의 포구 실책이 유일한 실책이었다. 하지만 야구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재앙(?)의 불씨가 살아나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화마로 연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멘탈게임’(mental game)이다. 1회초 선두타자 이용규가 안타를 치고 나간 후, 곧바로 2루 도루를 감행했는데 일본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포수 조지마가 2루로 던진 공이 너무 높게 들어가는 바람에 이용규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정상적인 높이의 송구로 연결되었다면 타이밍상 이용규는 자동아웃이었다. 일본 팀의 두 번째 불행은 2루 땅볼을 잡은 이와무라의 악송구 아닌 악송구에서 일어났다. 1루주자 정근우를 포스아웃 시키려고 2루에 던진 공은 방향성에서는 정확했을지 몰라도, 주자와 송구를 잡기 위해 들어온 유격수가 겹치는 곳으로 공을 던져 유격수의 포구를 결과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계속된 1사 만루에서 일본의 매끄럽지 못한 수비는 또 한번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이진영의 좌전안타가 나왔을 때 2루주자였던 김현수가 과감하게 홈까지 파고들었는데 사실 홈까지 노리기에는 다소 무리라 싶은 정황이었다. 이진영의 안타가 땅볼타구였기 때문에 2루주자가 홈으로 뛰어드는 것이 일면 당연해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2사 후가 아닌 1사 후였다는 점과 좌익수가 앞으로 대쉬하면서 타구를 걷어낸 지점이 홈에서 상대적으로 멀지 않은 위치였다는 점, 그리고 김현수의 발이 느린 편은 아니라 하더라도 준족급의 선수가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어느 정도 위험부담이 있었던 주루플레이였다. 하지만 일본의 좌익수 아오키의 홈송구가 3루 덕아웃 쪽으로 치우쳐 들어온 덕에 김현수는 무사히 홈을 밟을 수 있었고, 포수와 2루수 그리고 좌익수에서 잇달아 터져 나온 3차례의 송구 미스는 결국 고스란히 일본의 3실점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한국의 처지에서 결과는 대성공이었지만 과정은 너무도 아슬아슬함 그 자체였다. 3년 전에 열렸던 2006 WBC에서도 한국은 일본과의 2라운드 맞대결 때 8회초 1사 1루 상황에서 이병규의 중전안타에 1루주자 김민재가 욕심을 부리다 3루에서 비명횡사 할 지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일본의 3루수 이마에가 태그 도중 공을 떨어뜨려 김민재는 십년감수 기사회생 할 수 있었고, 이후 결승 득점으로 이어졌던 전례를 기억한다. 1회초 수비난조로 3점을 내주긴 했지만 이후 별다른 위기 없이 호투한 다르빗슈가 마운드에서 물러나 덕아웃으로 돌아왔을 때 하라 감독의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싸늘한 모습이 중계카메라에 들어왔다. 이 장면은 경기 내내 굳은 표정 속 침묵으로 일관했던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한국과의 경기를 어떤 마음가짐 속에서 치르고 있는 지를 그대로 대변해주는 장면이었다. 어쩌면 일본의 실책 아닌 실책은 이 속에서 이미 그 싹을 틔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비단 수비만을 놓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야구의 주루플레이에서 보듯 공격 팀의 과욕 또한 보이지 않는 실수이며 기록되지 않는 실책이다. 경기의 성패는 여기에서 갈리게 된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끝내기 실책은 60회 가량 기록되었다. 만 27년이 지난 프로야구 역사를 감안하면 1년에 약 두 번 꼴이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는 실책으로 경기를 마감한 경우는 그보다 훨씬 많다. 공식기록원이 잡아내지 못하는 실책(규칙상 실책을 기록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즉 ‘기록되지 않는 실책’이 경기결과의 향방을 가름 짓는 많은 요인들 중에서도 무엇보다도 영향력 있는 요소임을 이번 한-일전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