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프로야구 첫 ‘승부치기’, 주연은 이종범
OSEN 기자
발행 2009.03.27 12: 54

올 시즌 시범경기와 올스타전에 한해서 처음 도입하기로 한 승부치기가 마침내 그 얼굴을 드러냈다. 시범경기가 개막되기 전, 정규이닝 동안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10회부터 곧바로 승부치기에 돌입하기로 결정한 바 있는데, 3월 26일 광주에서 맞붙은 KIA와 두산이 그 첫 성적표를 받아든 것이다. 시범경기가 시작된 이후 팀마다 승부치기 목전에서 끝내기 안타나 폭투가 때마침 나와 연장전에 들어갈 뻔한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해 내곤 했는데, 이날 만큼은 상황이 꼬였다. 홈 팀 KIA는 경기 막판 승부를 끝낼 수 있는 호기의 상황이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번번이 이를 살려내는데 실패하며 첫 승부치기를 치른 구단으로 두산과 함께 야구역사에 그 이름을 나란히 올렸다. 그런데 이날 경기가 승부치기까지 내몰리게 된 이전의 전개과정을 들여다보면 반쯤은 이종범 덕분(?)이었다. 2-2로 팽팽히 맞선 7회말, 1사 1, 3루 상황에서 3루주자였던 이종범은 1루주자 이호신이 2루로 뛰는 틈을 타 홈쪽으로 스타트를 끊으려 했다가 여의치 않자 3루로 되돌아가려 했는데, 이 와중에서 2루수의 송구로 3루에서 태그아웃(도루자로 기록)이 되고 만 것이다. 경기흐름상 여기가 승부처였다. 혹시나 하는 불길한(?) 조짐은 그 때부터 감지되기 시작했지만 이종범에게는 7회의 주루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한번 더 있었다. 9회말 차일목의 2루타로 만든 2사 2루의 끝내기 찬스에서 자신에게 타석이 돌아왔던 것이다. 이날 광주구장은 서풍이 초속 5m를 넘나들 만큼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대고 있었다. 일기상 아무도 원할 리 없는 연장전. 이쯤에서 그만하고 싶은 눈치들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이종범은 만인의 기대를 저버리며 4구째를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미 공표한 규정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얼마 안되는 관중이 지켜보고 있는 추운 날씨 속의 시범경기라지만 엄연한 공식경기였다. 역사적인 10회초(?)를 시작하기 전, 양 팀은 익숙치 않은 절차에 잠시 뜸을 들여야 했다. 몇 번 타자부터 공격을 개시할 지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9회말에 두산은 4번타순, KIA는 6번타순에서 각각 공격이 종료되었지만 10회초, 말의 공격은 규정상 타순 어디에서 시작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잠시 후 두산은 3번부터, KIA는 4번타순부터 공격을 시작한다고 기록실로 알려왔다. 두산은 발빠른 민병헌과 오재원을 주자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반면 KIA는 신인급 선수들이 상위 타순에 포진해 있던 관계로 한칸 밀린 4번 최경환부터 시작할 수 있는 공격 옵션을 선택해왔다. 그러나 양 팀이 받아든 결과는 정반대였다. 두산은 의도했던 대로 3번타자 정수빈의 진루타 후, 4번 왓슨의 희생플라이로 리드점을 올리는데 성공했지만, KIA는 4번 최경환의 우전안타로 만든 무사 만루의 역전 기회에서 1-2-3으로 연결되는 투수 앞 병살타가 나오는 바람에 2사 2, 3루의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그 순간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또 다시 이종범. 9회말의 마지막 타자였던 이종범이지만 임의로 타순을 선택할 수 있다는 희한한 규정 덕분에 뻔뻔하게도(?) 타격 기회가 금방 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의4구’가 이종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2009 WBC 결승 연장전에서 한국팀이 이치로를 만났던, 두고두고 아쉬운 바로 그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이종범을 거르는 것은 수비측의 당연한 선택이었고 결과는 대성공. 이에 힘입어 두산은 KIA를 3-2로 누를 수 있었고, 프로야구 승부치기의 다소 짜릿했던 첫 경험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런데 이날 경기결과를 놓고 이종범 만큼이나 아쉬움을 느껴야 했던 선수가 또 한 명 있었다. 투수 임준혁(KIA)이다. 임준혁은 9회초에 등판해 10회까지 2이닝 동안 6명의 타자를 맞아 삼진 2개를 곁들이며 두산의 타선을 완벽히 틀어막았는데 기록상 1실점,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족보에 없는 주자 2명을 루상에 세워놓고 공격을 시작해야 하는 승부치기 규정이 황당한 결과의 원흉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내보낸 주자가 아님에도 실점을 하게 되면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규칙이 임준혁을 패전투수로 만든 것이다. 만일 임준혁이 9회까지 노히트노런이나 퍼펙트경기를 해왔다고 가정하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을까? 규칙위원회에서 승부치기 이닝의 모든 개인 기록들을 정규이닝 기록들과는 별개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배경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터라 다소의 어색함 속에서도 낯선 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을 함께 맛보게 해준 첫 승부치기. 그렇지만 기록상으로는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제도인지를 새삼 눈으로 확인시켜 준 하루이기도 했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