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8일, 탬파베이가 텍사스에 7-3으로 리드하고 있던 9회말. 주자 상황은 2사 만루였다. 이때 탬파베이는 타석에 들어선 상대 팀의 주포 조시 해밀턴(텍사스 레인저스)을 고의4구로 걸러 내보내는 특단의 선택을 했다. 밀어내기 상황이라 1점을 거저 헌납함은 물론, 큰 것 한방에 경기를 그르칠 수 있는 위험성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작전이었지만 결과는 성공(7-4로 승리)이었다. ‘고의4구’에 있어 메이저리그의 대명사 격으로 인정받는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 역시 9회 만루상황에서 고의4구로 1루에 나가 타점 한 개를 거저 올린 진귀한(?) 경험의 소유자로 기록되어 있다. 1998년 5월 29일, 애리조나가 8-6으로 앞선 상황에서 애리조나의 벅 쇼월터 감독은 배리 본즈를 고의4구로 걸릴 것을 마무리 투수 그레그 올슨에게 지시했다. 이후 단타 하나면 역전까지 당할 수도 있는, 전자의 경우보다 훨씬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음 타자 브렌트 메인을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낼 수 있었고, 감독의 도박성 결정은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으로 귀결되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만루상황에서 고의4구로 타자를 걸러 내보낸 기록이 아직은 없다. 앞서 메이저리그의 극단적 성공사례를 살펴보았지만 고의4구가 늘 이득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론 주자수만 늘린 꼴이 되어 대량실점이라는 회복불능의 치명적인 참상를 몰아주기도 한다. 2006년 WBC 본선 때 1-3으로 끌려가던 미국이 4회, 2사 2루에서 이승엽을 걸렀다가 다음 타자 최희섭에게 3점홈런을 얻어 맞고 완전 그로키 상태로 몰린 경우가 그런 예다. 올 시즌 초반, 홈런 더비 단독선두(13개)에 오르며 위압적인 타자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기 시작한 최희섭(KIA)은 5월 18일 현재 총 7개의 고의4구를 얻어내 이 부문 역시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국내로 선회해 뛴 지난 2년간(2007~08년) 최희섭이 얻어냈던 고의4구가 단 2개에 그쳤던 점을 감안하면 그만큼 무서운 타자로 돌변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기에 연관되어 시즌 도중 LG에서 KIA로 옷을 바꿔 입은 김상현(29)은 최희섭의 고의4구 폭증에 따른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중이다. 3번의 만루홈런에 모두 최희섭의 기피성 4구가 함께 하고 있다. 고의4구 선택에 따른 반작용인 셈이다. 한편 시즌 최다 고의4구 기록은 이종범(KIA)이 보유하고 있다. 1997년에 작성한 30개가 최다기록이다. 4할 타율-200안타에 가장 근접(0.393-196안타)했던 1994년에 세운 기록이 아닐까 여기기 쉽지만 그 해엔 14개의 고의4구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통산 최다기록은 양준혁(삼성)의 144개(2008년 종료 기준)다. 고의4구 관련 기록에 있어 지금 들여다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기록이 하나 눈에 띄는데, 1984년 홍문종(롯데)의 ‘9연타석 고의4구’와 ‘한 경기 최다 고의4구(5개)’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개인 타이틀 경쟁(타격 3관왕)에서 이기기 위한 상대 팀의 정면 대결 기피로 인해 생겨난 죽은 기록이다. 2009 WBC 결승에서 이치로(일본)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고집했다가 끝내 결승타를 내주고 사방 뭇매(?)를 맞았던 임창용의 국내 고의4구 허용수는 과연 몇 번이나 될까? 총 36개였다. 13년간 통산. 이채로운 팀 기록도 눈에 띈다. 2004년 9차전의 혈투 끝에 삼성을 누르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던 현대 유니콘스는 그 해 정규리그 동안 상대 팀에 단 1개의 고의4구도 내주지 않았다. 그 때 뿐만이 아니라 2006년에도 팀 통산 고의4구 허용수가 ‘0’ 이다. 2005년에도 단 2개였다. 역사 속에서 한때 '경원사구(敬遠四球)'로도 불리던 고의4구는 그 기원을 1901년에서 찾고 있다. 기록 역사에 따르면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냅 라조이(필라델피아)를 상대로 9회 무사 만루(11-7 상황)에서 고의적으로 볼 4개를 던져 내보낸 작전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4구’와 ‘고의4구’를 구별하는 기준은 눈에 보이는대로 아주 단순할 것 같지만 기록원이 판단을 내림에 있어 원칙이 하나 있다. 가장 흔한 장면은 포수가 일어난 상태에서 완전히 옆으로 빠져 공 4개를 하나하나 받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포수가 일어나지 않고 옆으로 빠져 앉은 상태에서 볼을 유도(유인구)했다면 걸리고자 하는 의도는 다분했다고 인정되지만 고의4구로는 기록하지 않는다. 만일 3번째 ‘볼’까지는 정상적으로 투구하고 마지막 4번째 ‘볼’ 만을 일어서서 받았다면 고의4구다. 반대로 포수가 3번째 ‘볼’까지 일어나서 받다가 마지막 4번째 ‘볼’을 정상적으로 앉은 상태에서 받았다면 고의4구가 아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마지막 4번째 ‘볼’이 어떤 모양새로 투구되었느냐가 고의4구 판단의 핵심인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4월 29일, SK의 김성근 감독은 두산과의 경기에서 6-6으로 팽팽히 맞선 연장 11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일발장타력을 갖고 있는 최준석(두산)을 고의4구로 걸리고 다음 타자였던 만만한(?) 투수 금민철을 골라 삼진으로 돌려세운 일이 있다. ‘고의4구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을 또 한 가지 가르쳐 주기라도 하듯. ‘고의4구’,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양날의 검이다.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오로지 그 결과만이 알고 있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올 시즌 7개의 고의4구를 얻고 있는 최희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