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LG 타선의 융해점은 ‘-8점’
OSEN 기자
발행 2009.06.04 10: 25

어쩌다 생긴 우연이겠지 치부했던 일이 자꾸 거듭되면 우연은 필연으로 변한다. 빗맞은 바가지성 안타를 흔히 행운으로 돌리지만 이러한 안타를 어느 특정 선수가 심심찮게 기록한다면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그의 실력이다.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한 장원진(두산)을 대할 때면 늘 오버랩 되는 잔상이 그런 예다.
요즘 2002년을 끝으로 대가 끊긴, 7년만의 4강권 진입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LG의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보는 사람이 애가 닳아 지칠 지경이다.
안정권이다 싶은 리드 점수도, 백기를 들어야 당연해 보이는 비하인드 점수도 따로 없다. 쉽게 이길 경기도 어렵게 이기고 대패를 할 것 같은 경기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곤 한다.
팬들로서는 쉽사리 주저앉지 않는 LG의 찰떡 같은 점성야구가 일견 원망스러우면서도 대견해 보일 수 있겠지만, 팀의 피곤도를 나타내주는 체감지수가 일반 경기보다 몇 배 더 높다는 점에서는 승패를 떠나 마냥 반길만한 현상은 결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LG야구에 요즘 이상한 징크스가 자주 따라 붙고 있다. 대패 분위기, 특히 ‘8점’차로 지고 있을 때부터 그들의 움직임이 비로소 시작되는 해괴한(?)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사례1)
5월 12일, SK를 상대로 치른 잠실 홈경기에서 LG는 9회초까지 1-9로 뒤지고 있었다. SK에 비축된 투수력을 감안하면 승패는 이미 가려졌다고 누구나 예단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LG는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14명의 타자가 나와 8안타를 폭퐁처럼 몰아치며 무려 8득점을 올리는데 성공, 기어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어진 2사 만루의 계속된 찬스에서 정성훈의 잘 맞은 타구가 중견수 정면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화룡점정에 실패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
결국 LG는 연장 12회에 대거 6실점하며 주저 앉았고(10-16),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지켜낸 SK로서는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을 새삼스레 뼛속 깊이 느껴야 했던 하루였다. 이날 소요시간은 5시간 39분이었다.
☞(사례2)
5월 15일, SK와 그 난리를 치른 지 불과 3일 뒤 LG는 또 한번 대형사고를 쳤다. 목동에서 열린 히어로즈 전에서 LG는 선발 정재복과 릴리프 이재영의 난조로 4회말까지 5-13, 8점차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LG는 김광수의 호투로 경기를 진정국면으로 전환하며 꾸준하게 따라붙은 끝에 마침내 7회초, 14-13의 기적 같은 역전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최종적으로 22-17로 LG가 승리를 거둔 이날 경기는 한 경기 최다득점(종전 38점), 한 경기 최다안타 40개(종전 39개), 한 경기 최다 루타수 84루타(종전 75루타)등, 새로운 타격 신기록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소요시간은 4시간 39분.
☞(보너스 사례1)
5월 21일, 이번에는 광주였다. KIA를 상대로 LG는 새로운 외국인투수 바우어를 야심차게 등판시켰지만 1회부터 무너지며 초반 9실점, 경기양상은 3-9의 대패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LG는 올 시즌 살아난 뒷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10-10 동점에 이어, 10-13으로 패색이 완연하던 9회초에 또다시 3득점을 올려 13-13을 만들어내는 끈기를 보여주었다.
경기는 결국 연장전으로 접어들었고 12회까지 치렀지만 양 팀 모두 건질 것 하나 없는 무승부. 자정을 넘겨 0시9분에 끝난 이날 경기의 소요시간은 6시간에 1분 모자란 5시간 59분, 프로야구 역대 최장 경기시간(종전 5시간 51분)이라는 새로운 기록의 탄생을 거창하게 알린 날이었다.
☞(사례3)
6월 2일, 힘겨웠던 계절의 여왕 5월이 가도 LG의 이전투구는 그대로였다. 새로운 달 6월을 맞아 치른 한화와의 잠실경기에서 LG는 또 한번 헛심을 썼다. 8회초가 끝났을 때의 스코어는 1-9. 한화의 일방적 리드였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LG가 아니었다. 눈앞에는 ‘비하인드 8점차’라는 점수가 아른거렸고, 그것이 마치 신호인 양 그들은 또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8회말 4점을 뽑아 점수차를 ‘-4’로 좁힌 LG는 9회초에 2점을 더 달아나 안정권으로 접어들었다 싶었던 한화를 그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9회말 들어 LG는 일거에 5점을 뽑아 1점 차 턱밑까지 파고 들었다. 그리고도 2사 1, 2루. 기회는 이어졌지만 역시 마지막 한 방은 끝내 터지지 않았다. 10-11의 아쉬운 패배로 막이 내렸고 소요시간은 4시간 2분이었다.
☞(보너스 사례2)
6월 3일, 전날과 똑같은 10-11이었다. 7회초까지 6-10으로 LG가 뒤지고 있었지만 이대로 싱겁게 경기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동안 LG가 보여준 야구의 학습효과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LG는 또다시 따라붙었고 9회말 1점차까지 간격을 좁혀봤지만 역시 거기까지였다. 2사 2, 3루의 끝내기 기회에서 또 한번 무릎을 꿇어야 하는 LG에 남는 것은 탄내나는 미련뿐이었다. 이날 걸린 경기시간은 4시간 8분.
고체가 액체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기점을 과학용어로 ‘용융점’ 또는 ‘융해점’이라고 한다. 이를 대입해 보면 올 시즌 2할 9푼대의 고타율로 팀 타율 1위를 질주하고 있는 LG 타선의 융해점은 -8이다.
그렇지만 ‘-8’이나 ‘완패 분위기’에서 시작되는 LG타선의 돌연변이는 현재까지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두텁지 못한 투수력인데 여러 차례에 걸친 어지러운 싸움으로 불펜의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겨도 뒷 탈이 걱정인데 앞서 거론한 대표적 5번의 대 격전(?) 속에서 얻어낸 전리품은 고작 1승 뿐이다. 5경기 동안 36명의 투수가 나와 24시간 넘게 일하고 65점이나 뽑아냈는데 들인 공에 비해 열매는 너무도 초라하고 쓰다.
한때 2위까지 치고 올랐던 LG지만 지금은 4강권 밖으로 다시 밀려나 있다. 믿을 만한 중간과 마무리 투수의 부재가 통탄의 경지다. 팀 타율 3할에 육박하는 팀이 이렇게 고전하는 경우를 일찌기 본 적이 없다.
야구장에서, TV앞에서 매 경기마다 가슴을 졸이며 LG를 응원하는 팬들의 가슴은 아직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검게 타 들어가고 있다. 이해관계가 없는 야구 관계자들마저도 LG의 힘겨운 싸움 끝에서 고개를 가로젓는 마당인데 오죽하겠는가.
타선이 아닌 LG 마운드가 융해를 시작하는 날은 정녕 오지 않을 것인지….
윤병웅 KBO 기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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