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사직구장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만 10년 전인 1999년 5월 9일, 펠릭스 호세(롯데)에 의해 프로통산 ‘1만호 홈런’이 아로새겨졌던 바로 그곳에서 ‘2만호 홈런’이라는 또 한번의 기념비적인 이정표가 세워졌다. 주인공은 프로 4년차 외야수인 한화의 연경흠(26). 주로 대타나 백업 멤버 노릇으로 프로 데뷔 후 단 한번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해보지 못한 그가 행운의 2만호 홈런 기록 당사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잠실에서 LG의 최동수가 19999호 홈런을 기록(대 SK전)했다는 소식이 날아든 시각은 밤 9시 6분. 이후 경기가 일찍 종료된 목동 구장(히어로즈 vs KIA)을 제외한 각 구장(잠실, 대구, 사직)엔 본격적인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KBO 내에서는 경기가 중계되고 있는 TV채널 3곳을 동시에 비교 확인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모두 갖춘 상태였고, 현장에서도 혹시 모를 시차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구장 전광판에 표출되고 있는 시계를 버리고, 공식기록원이 갖고 있는 휴대폰을 사용해 홈런이 터진 시간을 정확히 체크하도록 안전장치를 가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통상적으로는 홈런이 터진 시간을 각 구장에 설치된 시계를 근거로 기입하고 있지만, 구장마다 1분 내외의 시간적 오차가 어느 정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두 구장에서 동시에 홈런이 터진다면 분 단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초 단위로 희비가 엇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시 18분. 삼성과 두산이 난전을 벌이고 있는 대구구장에 먼저 시선이 끌렸다. 삼성이 10-9로 한 점을 앞서가고 있는 상황(5회말 2사 만루)에서 양준혁이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 순간 양준혁을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통산 1만호 홈런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던 10년 전 그날, 사실상 1만호 홈런을 기록했으면서도 송지만(당시 한화)이 약 한달 전(4월 21일 청주), 홈런을 치고도 홈 플레이트를 밟지 않아 ‘루 공과’ 사유로 아웃(3루타)된 후유증으로 1만호 홈런이 졸지에 ‘9999호 홈런’으로 격이 강등되고 만 속 쓰린 경험을 안고 있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불운을 씻어낼 수 있으려나? 시간적으로 보나 경기상황적으로 보나 더 없는 좋은 기회였지만 양준혁은 볼넷으로 걸어나갔다. 21시 27분. 송승준(롯데)의 4연속 완봉승의 제물이 될 수도 있는 위기를 일찌감치 모면(3회초)한 한화가 5-3으로 전세를 뒤집고 난 8회초 공격, 선두타자로 나온 6번 이범호의 잘 맞은 타구가 중견수 머리 위쪽으로 크게 떠올랐다. 바로 전 타석에서도 홈런(19997호)을 때려낸 바 있는 그였기에 순간 2만호 홈런의 주인공으로 간택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중견수 전준우의 호수비에 걸려 아웃. 설령 잡히지 않았더라도 담장 가운데 부분을 맞고 튀어나올 함량 미달의 타구였다. 21시 30분. 이범호에 이어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7번 연경흠이었다. 프로 4년 통산 20개의 홈런(올 시즌 6개)을 기록하고 있는 일발 장타보다는 교타자로 익히 알려진 그였다. 장점은 배트 스윙 스피드가 무척 빠르다는 정도. 자연 사직구장보다 다른 구장으로 좀더 관심이 옮겨진 가운데, 볼카운트 1-3의 유리한 시점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연경흠은 투수 이정훈(롯데)이 던진 공을 향해 배트를 내밀었고, 설마 했던 타구는 ‘어~어~’하는 사이 좌중간 담장을 살짝(비거리 115m) 넘어가고 말았다. 2만호 홈런이었다. 이후 밤 10시가 되도록 20001호 홈런 소식은 잠잠했다. 호세의 1만호 홈런(15:51) 때는 불과 기록달성 1분 후(15:52)에 피어슨(현대, 인천구장)이 10001호 홈런을 때려내 선수 개인적으로 아쉬움을 곱씹어야 했던 기억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시차가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22시 11분. 때늦은 20001호 홈런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번에도 LG의 박용근(9회말 대타)이었다. 그러고 보니 LG가 2만호 홈런을 가운데 두고 한 끗 차이로 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 홈런을 터뜨린 꼴이었다. 그것도 앞 뒤로. 이날 사직경기가 열린 부산은 초등학교 휴교령이 내려질 정도로 한 낮까지 집중 호우가 쏟아졌다. 당연히 경기가 열리기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오후 들어 장마전선이 해상으로 물러난 덕에 순연되지 않고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록이 탄생했다. 폭우에도 경기가 열릴 수 있었던 점이나 흔히 거론되는 홈런타자가 아닌 연경흠이 그 주인공으로 낙점된 것 또한 결국은 하늘의 뜻이었다. 다만 생각지도 않았던 횡재를 한 연경흠이지만 내놓고 마냥 기뻐할 수 만도 없는 하루였다. 1만호 때나 이번 2만호 때나 해당 기록을 달성한 팀이 모두 역전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호세의 홈런에도 롯데는 당시 해태에 5-7로 역전패를 당한 바 있는데, 연경흠의 한화도 연장전 끝에 롯데에 6-7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기념비적인 이정표로 기억될 순간을 누가 장식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과거가 곧 풍성한 역사로 환생하는 프로야구가 주는 또 다른 재미이자 화제거리다. 늘 예상했던 대로만 결과가 나온다면 얼마나 식상하겠는가. 연경흠처럼 의외의 인물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면 생겨날수록 후세에 전할 이야기는 그만큼 풍성해지기 마련이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