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수위타자를 향한 잔인한 게임, ‘모(毛)의 전쟁’
OSEN 기자
발행 2009.09.08 09: 27

프로야구에서 수위타자를 가리는 일은 다른 여타 부문의 타이틀 홀더 선정기준과 비교해 볼 때, 대단히 잔인한(?) 면을 가지고 있다. 투수의 다승이나 도루 또는 홈런이나 최다안타 부문처럼 누적 통계를 기준으로 우열을 가리게 되는 경우, 동률 1위가 나오면 숫자에 관계없이 모두 다 1위를 차지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확률이 그 가름판 노릇을 하는 타율 부문은 타수와 안타수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 이상, 공동 1위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최후의 승자를 가려낸다. 2007년 KIA의 이현곤(0.3377)은 시즌 최종 전까지 가는 대 접전 끝에 할, 푼, 리의 외관상 동률(.337)이던 양준혁(삼성, 0.3371)을 ‘6모(0.0006)’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타격 1위에 올랐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올 시즌 이러한 ‘모의 전쟁’이 다시 부활하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 2위와 2푼 차 이상의 간격을 벌리며 타율 부문 독주태세로 들어서는가 싶었던 홍성흔(롯데)을 LG의 박용택이 무서운 기세로 따라 붙은 것이다. 9월 8일 현재, 1위 홍성흔(.3709)과 박용택(.3707)의 타율 차이는 불과 ‘2모(0.0002)’. 최근 벌어진 3경기에서 홍성흔이 11타수 1안타의 부진에 빠진 사이, 박용택은 10타수 5안타를 몰아치며 리딩히터 홍성흔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두 타자의 소속팀 잔여 경기수는 롯데보다 LG가 3경기 더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타율 싸움의 유불리는 잔여 경기수와는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니어서 큰 의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타율 차이가 근소할 경우, 먼저 시즌을 종료한 사람에 비해 경기가 남아있는 사람이 타율을 조절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유리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2007년의 수위타자 이현곤 역시 시즌 최종전 첫 타석에서 안타를 뽑아내지 못하자 3회말 대타 이재주로 교대되어 경기에서 물러난 바 있다. 지금까지 프로야구 출범 이래 수위타자를 놓고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해는 1990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타격왕에 올랐던 한대화(해태)의 타율은 0.3349로 2위 이강돈(빙그레, 0.3348)과의 차이는 그야말로 깻잎 한 장(?)보다도 적다는 ‘1모(0.0001)’차에 불과했다. 여기서 한 뼘 더 속을 파고들어보면 실상 ‘1모’보다도 더 적은 ‘7사’차이(0.33493-0.33486)였다. 특히 그 해 수위타자 경쟁은 노찬엽(LG, 0.333)까지 가세한 3파전으로 진행돼 마치 경극을 보듯, 시즌 막판 타격1위 자리의 얼굴이 자고 나면 바뀌어있는 극심한 혼전양상으로 치달았던 한 해였다. 1991년 같은 고등학교(대구상고) 선, 후배간의 타격왕 경쟁 역시 열기가 뜨거웠다. 1위 이정훈(빙그레, 0.348)과 2위 장효조(롯데, 0.347)의 차이는 단 ‘1리’뿐. 하지만 공교롭게도 시즌 최종 전에서 맞붙게 된 두 팀간의 맞대결에서 빙그레는 장효조를 거푸 걸러 내보내며 이정훈의 타격왕 타이틀을 지켜냈다. 또한 겉으로 드러난 숫자적 기록만을 놓고 볼 때, 수위타자 경쟁이 꽤나 치열했던(?) 1984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한 해로 보인다. 당시 1위 이만수(삼성, 0.340)와 2위 홍문종(롯데, 0.3388)의 간격은 역시 단 ‘1리 2모’. 그러나 그 속은 이만수의 타격 3관왕에 줄기가 얽혀 추격자 홍문종의 ‘9연타석 연속 고의4구’라는 희대의 진기록이 만들어지는 등, 이전투구속 타율 전쟁이었다. 2000년 타격왕 박종호(현대, 0.340)와 김동주(두산, 0.33829) 그리고 브리또(SK, 0.33827)와 송지만(한화, 0.3376)에 의해 달궈졌던 수위타자 싸움도 팬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치면 타격1위에 오를 수도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내던져 버리고 한국을 등진 브리또와 벤치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타이틀을 지켜낸 박종호의 대조적인 모습이 묘하게 어우러져 많은 것을 생각케했던 한 해였다. 이번 홍성흔과 박용택, 두 선수가 펼치게 될 2009 수위타자 경쟁은 또 어떤 모습으로 역사에 기억될런지….롯데와 LG의 맞대결 잔여 경기수는 딱 1경기 뿐이다. 야구경기에서 타율을 나타낼 때 쓰이는 할(割), 푼(분:分), 리(厘)는 비율을 소수로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한자식 수의 단위다. 할은 1/10을 말하며, 푼은 할 뒤에 붙어 할의 1/10 즉 1/100이 되고, 리는 푼의 1/10 즉 1/1000이 된다. 참으로 작디작은 숫자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답이 안 나오는 것이 바로 타율전쟁이다. 때론 1/10000을 뜻하는 모(毛)까지도 타고 내려와야 한다. 지금 이해 당사자인 두 타자들은 물론, 타율 결정권을 손에 쥐고 있는 공식기록원들의 가슴은 벌써부터 바싹바싹 타 들어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매번 느끼지만, 수위타자를 앞에 놓고 벌어지는 소수점 아래의 넷째 자리 숫자싸움인 ‘모(毛) 전쟁’은 지독히도 잔인한 게임이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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