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할의 전설’백인천의 야구 이야기(1) ‘李라인’을 넘어서
OSEN 기자
발행 2009.11.30 14: 42

4할1푼2리. 백인천(66) LG 트윈스 전 감독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MBC 청룡 감독 겸 선수로 기록한 타율이다. 흔히 ‘꿈의 타율’로 불리는 4할은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백인천 전 감독의 기록이 유일무이하다. 올 시즌 후 김태균(27)과 이범호(28)가 지바롯데 마린스와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진출,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게 일고 있는 시점에서 일본 이 한국 태생 일본 프로야구 선수 원조격인 백인천 전 감독의 야구인생을 새롭게 조명했다. 지난 11월22일부터 27일까지 6회에 걸쳐 에 연재된‘현해탄을 넘어서, 백인천의 야구 이야기’는 그가 태어나서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진출, 1975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타이틀 획득, 1982년에 귀국해 MBC 청룡의 감독 겸 타자로 활약할 당시의 뒷얘기를 그려낸 것이다. OSEN은 제공으로 이 기사를 번역, 원문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주] 백인천의 야구 이야기(1)‘이(李)라인’을 넘어서 1965년 2월22일 저녁. 한국 김포공항을 떠나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던 노스웨스트 항공기에서 한 청년이 내려왔다. 이름은 백인천. 한국야구대표 포수로 활약했던 18살의 그는 일본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 파이터즈)에 입단하기 위해 현해탄을 넘어왔다. 한국선수론 처음인 ‘일본프로야구 도전’이라는 신기한 일로 인해 공항 로비에는 많은 일본인 기자들이 진을 치고 기다렸다. ‘스피구라(스피드그래픽)’로 불리는 보도용 카메라의 플래시가 펑펑 터져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계약은 몇 년인가?” “포부는”따위의 질문이 쉴새없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백인천은 통역을 통해서 “계약은 병역을 하게 될 때까지 2년간이다”, “어찌됐든 내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다”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동요했다. “이렇게 주목받는데 만약 활약을 못한다면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날 일본의 스포츠 신문은 ‘李라인을 넘어선 첫 케이스’라고 백인천이 일본에 온 일을 소개했다. (☞‘李라인’은 1952년 1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반도 주변의 수자원 등에 대한 주권 행사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던 경계선을 말함. 이 경계선에 독도를 포함시켜 실효지배의 단초가 됨)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던 한국은, 격동 속에 놓여 있었다. 1960년에는 학생들이 촉발 시켰던‘4월 혁명’이 일어났고, 독재정치를 계속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퇴진했다. 1961년 5월에는 박정희 소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요즘에야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2007년)가 된 한국이지만 당시에는 이같은 국내 혼란도 있었고, 전력이나 자원 고갈로 경제는 위기 상황이었다.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흘렀다. 이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재일(在日)’도 아니었던 백인천이 왜 일본에 오게 됐던 것일까. 1960년 11월 경동고의 일본 방문이 그 계기였다. 백인천은 서울에 있는 야구 강호 경동고의 일원으로 일본의 고교생을 상대로 대활약했다. 시마오카 요시로 메이지대 야구부 감독이 유학을 권유했지만 한국의 반일 감정이 강해 한 때는 일본행을 단념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백인천은 농업은행(농협)에 들어가 1962년 1월에 한국야구대표로 대만에서 열렸던 아시아대회에 출장했다. 백인천은 돌아오는 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백인천은 일본에 들렀던 대표팀을 빠져 나와 입단을 타진했던 도쿄 교바시에 있는 도에이 구단 사무소를 방문, ‘일본에서 야구만 할 수 있다면’하는 생각에 다짜고짜 덜컥 가계약을 해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일을 저질렀군. 나라가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면목이 없어진 대한야구협회의 간부가 백인천을 향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래도 백인천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귀국 후, 박정희의 측근이었던 이주일(당시 대한체육회장)에게 대표팀이 귀국 인사를 하던 자리에서 백인천은 “일본에 가게 해 주세요”하고 직접 호소했다. 당황한 협회 간부가 백인천을 제지했다. 그런데, 의외에도 이주일은 “그를 막으면 한국은 발전하지 않는다. 유망한 젊은이는, 자꾸 해외로 내보내는 편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주일은 정권의 홍보 담당자에게, 백인천의 일본 프로야구 도전의 찬반 여론을 조사해줄 것을 지시했다. 여러 신문에 기고하는 지식인 등을 대상으로 한 조사의 결과는, 무려 8할이 ‘찬성’이었다.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백인천의 도에이 입단이 결판났다. 백인천이 일본의 프로팀 입단을 고집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중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던 백인천은 어느날 야구부의 지도교사가 들고 있던 일본의 잡지 의 표지에 시선이 고정됐다. 거기에는 릿쿄 대학의 슈퍼스타, 나가시마 시게오가 배트를 손에 들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교사로부터 “나가시마는 내년에 계약금 1800만 엔을 받고 요미우리 구단에 들어간다”고 들려줬다. 백인천은 “일본에서는 야구가 직업이 될 수 있구나”하고 프로야구의 존재에 대해서 놀랐다. “이 사람, 대단하네. 멋있구나. 언젠가 야구를 함께 해봤으면…”하고 무심결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선배가 “너, 바보냐”라며 꿀밤을 먹이면서 여러 선수들 앞에서 대놓고 “어허, 이 놈이 나가시마하고 야구를 하고싶대”하고 비웃었다. 백인천은 “농담이었어요”라고 그 자리에서 얼버무렸다. 그런 얘기가 있은 지 겨우 5년 뒤,동경했던 사람을 찾아서 마침내 일본 땅을 밟게 된 백인천. 파란만장한 프로생활이 시작됐다. 한국으로부터 일본의 프로야구에 도전했던 선구자로 모국에서의 프로야구 창설과 발전에 공헌했던 백인천은 올해 가을 그 공적을 인정받아 ‘한-일 문화교류기금상’을 받았다. 양국에 걸친 그의 야구 인생을 추적해 보았다.   [번역 및 정리=OSEN 홍윤표 기자] 백인천이 도에이 주축 타자로 활동하던 때의 모습(제공=산케이 신문) 【玄界灘を越えて】白仁天物語(1)李ラインを越えて 昭和37年2月22日夕。韓国・金浦空港から東京・羽田空港へ到着したノースウエスト機から、1人の青年が降りてきた。名は白仁天(韓国名=ペク・インチョン)。野球の韓国代表の正捕手として活躍した18歳は、日本の東映フライヤーズ(現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入団のため、玄界灘を越えてきた。 韓国から初となる「日本プロ野球挑戦」という物珍しさで、空港ロビーには大勢の日本人記者が待ち構えていた。「スピグラ」(スピードグラフィック)と呼ばれる報道用カメラのフラッシュがポンポンとたかれ、目がくらむ。 「契約は何年?」「抱負は」。矢継ぎ早に浴びせられる質問に、白は通訳を通して「契約は兵役に就くまでの2年間です」「とにかく自分の力を試したい」と答えたが、内心は動揺していた。「こんなに注目されるとは。もし活躍できなかったらどうやって責任を取ればいいのか…」 翌日のスポーツ紙は、白の来日を「李ライン(メモ参照)を越えて初めてのケース」と紹介した。 朝鮮戦争の傷跡がまだ残る韓国は、激動のさなかにあった。35年にはソウルの学生デモをきっかけに「4月革命」が起こり、独裁政治を続けた李承晩大統領が退陣。翌36年5月には朴正煕少将らが軍事クーデターを起こし、国家権力を掌握した。今でこそ、国内総生産(GDP)世界12位(2007年)となった韓国だが、当時はこうした国内の混乱もあって、電力や資源が枯渇。経済は危機的な状況にあり、街には失業者があふれていた。 そうした貧しい国から“在日”ではない白が、なぜ日本に来ることになったのか。きっかけは、35年11月の京東高校の来日だった。白はソウルにあるこの強豪野球部の一員として、日本の高校生を相手に大活躍。明治大学野球部監督の島岡吉郎に留学を誘われたものの韓国の反日感情は根強く、一度は日本行きを断念した。 だが、あきらめきれない白は、その後社会人野球の「農業銀行」に入り、37年1月に韓国代表として台湾で行われた野球のアジア大会に出場。その帰り道、一か八かの賭けに出た。日本へ立ち寄ったチームを抜け出し、入団を打診していた東京・京橋の東映球団事務所を訪問。「日本で野球ができるなら」と仮契約をしてしまったのだ。 「大変なことをしてくれたな。国が黙っていないぞ」。面目をつぶされた大韓野球協会の幹部は、烈火の如く怒った。それでも、白の意志は揺るがない。帰国後、朴正煕の側近だった李周一に「日本へ行かせてください」と命がけの直訴を敢行した。 あわてて白を止めにかかる野球協会幹部。ところが、意外にも李の意見はこうだった。「彼を止めるようでは韓国は発展しない。有望な若者は、どんどん海外へ行かせたほうが国のためになる」。李は政権の広報担当者に、白の日本プロ野球挑戦の賛否を問う世論調査を命じた。新聞各紙を使った知識人らを対象とした調査の結果は、なんと約8割が「賛成」。国民の後押しもあって、白の東映入りは決まった。 白が日本のプロ入りにこだわったのには、さらに理由があった。中学で本格的に野球を始めた白は、ある日、野球部の顧問教諭が持参した日本の雑誌『野球界』の表紙にくぎ付けとなる。そこには立教大学のスーパースター、長嶋茂雄がバットを手ににっこりとほほ笑んでいた。教諭から「長嶋は来年契約金1800万円で巨人入りする」とも聞き、白は「日本では野球が職業になるのか」とプロ野球の存在についても驚いた。 「すごいな、この人。かっこいいな。いつか一緒に野球をやりたい…」。思わず独り言をつぶやくと「お前、アホか」と先輩にこづかれ「こいつ、長嶋と野球をするんだってさ」。みんなの前ではやし立てられた白は、「冗談ですよ」とその場をごまかした。 だが、あきらめきれない白は、その後社会人野球の「農業銀行」に入り、37年1月に韓国代表として台湾で行われた野球のアジア大会に出場。その帰り道、一か八かの賭けに出た。日本へ立ち寄ったチームを抜け出し、入団を打診していた東京・京橋の東映球団事務所を訪問。「日本で野球ができるなら」と仮契約をしてしまったのだ。 「大変なことをしてくれたな。国が黙っていないぞ」。面目をつぶされた大韓野球協会の幹部は、烈火の如く怒った。それでも、白の意志は揺るがない。帰国後、朴正煕の側近だった李周一に「日本へ行かせてください」と命がけの直訴を敢行した。 あわてて白を止めにかかる野球協会幹部。ところが、意外にも李の意見はこうだった。「彼を止めるようでは韓国は発展しない。有望な若者は、どんどん海外へ行かせたほうが国のためになる」。李は政権の広報担当者に、白の日本プロ野球挑戦の賛否を問う世論調査を命じた。新聞各紙を使った知識人らを対象とした調査の結果は、なんと約8割が「賛成」。国民の後押しもあって、白の東映入りは決まった。  白が日本のプロ入りにこだわったのには、さらに理由があった。中学で本格的に野球を始めた白は、ある日、野球部の顧問教諭が持参した日本の雑誌『野球界』の表紙にくぎ付けとなる。そこには立教大学のスーパースター、長嶋茂雄がバットを手ににっこりとほほ笑んでいた。教諭から「長嶋は来年契約金1800万円で巨人入りする」とも聞き、白は「日本では野球が職業になるのか」とプロ野球の存在についても驚いた。  「すごいな、この人。かっこいいな。いつか一緒に野球をやりたい…」。思わず独り言をつぶやくと「お前、アホか」と先輩にこづかれ「こいつ、長嶋と野球をするんだってさ」。みんなの前ではやし立てられた白は、「冗談ですよ」とその場をごまかした。 そんな会話から、わずか5年後。あこがれの人を求めて、ついに日本に降り立った白仁天。波(は)瀾(らん)万丈のプロ生活が始まろうとしていた。 韓国から日本のプロ野球に挑戦した先駆者で、母国のプロ野球創設と発展にも貢献した白仁天さん(65)が今秋、功績を認められて「日韓文化交流基金賞」を受賞した。その両国にまたがる野球人生を追った。 ■李承晩ライン 1952(昭和27)年1月18日、韓国の李承晩大統領が朝鮮半島周辺の水産資源などに対する主権行使を一方的に宣言した境界線。日本固有の領土で、韓国も領有権を主張する竹島(韓国名・独島)を内側に含んでおり、韓国が島を“実効支配”するきっかけとなった。  戦後、日本漁船の操業水域を指定したマッカーサーラインが同年4月の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発効で廃止される直前だった。65(同40)年の日韓漁業協定締結で撤廃されたが、ライン内で300隻以上の日本漁船が拿捕(だほ)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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