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북한에서 월남하다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한 백인천은 도쿄 고마자와의 합숙소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첫 해는 줄곧 2군에서 지냈다. 외식도 할 수 없었고, 여태껏 먹어본 적도 없었던 일본 음식에 얼떨떨했다. 이를테면, 참치회(사시미)는 핏덩어리로만 보였고 소금구이로 해서야 겨우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영양 섭취가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에서 맹연습에 몰두하는 바람에 73㎏이었던 몸무게가 58㎏으로 뚝 떨어졌다. ‘역시 일본 야구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인가’하는 회의가 들었다. 몸이 쇠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고립감을 안겨줬다. 유일한 대화 상대는 밤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달이었다. 숙소를 거닐면서 고향의 가족을 생각했다. 백인천은 1943년 11월, 중국 상하이 인근 우시(無錫)에서 태어났다. 훗날 이라는 노래로 알려진 거리에서 그의 아버지 백경도(白慶道)는 일본 주둔군을 상대로 극장을 경영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일가는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철산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일본군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시베리아행 화물열차에 실려버렸다. 만약 백인천의 아버지가 그대로 억류됐다면, 그의 인생은 아주 달라져버렸을 것이다. 이 엄청난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순찰을 돌던 담당관이었다. 그는 백인천의 아버지에게 “어째서 그대가 여기에 있는가”하고 물었다.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그의 아버지는 화물열차에서 탈출, 남쪽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 후, 백인천의 가족들은 아버지의 뒤를 쫓아 월남했다. 서울의 민가에 단칸 방(다다미 8장짜리)을 빌려 여섯 가족이 살았다. 그 부근은 원래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 거리였다. 빈 집에 가죽제품의 장갑과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이 게 야구라고 하는 스포츠에서 쓰는 글러브’라는 것을 어른에게 배웠다. 눈동냥으로 시작한 캐치 볼이, 백인천의 긴 야구 인생의 출발이었다. 그렇게 객지에서 고생했던 그의 아버지는 백인천이 일본으로 갈 때, 자신의 조언을 편지로 써서 건네줬다.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해서 해라. 그러면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달을 쳐다보면서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백인천은 일본어도 배울 겸해서 합숙소의 전화당번을 맡았다. 상대는 선배 선수들의 연인이 많았다. 백인천이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대답을 해주자 상대방의 호감을 사게 만들어 선배들에게 선물을 들고 온 여성이 ‘이것은 백 군에게 주라’고 한 적도 있었다. 백인천은 필사적으로 말을 기억하려고 사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화당번을 하는 도중에 큰 거울 앞에서 서성거리면서 중얼거리기를 거듭했다. 옆방에서 기거하고 있던 도바시 마사유키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이 녀석은 한국에서 와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 너희들도 좀 본 받아라”라고 후배들에게 충고했다. 에이스 투수인 도바시 마사유키가 젊은 후배들에게 설교를 한 탓인지 백인천은 선배들에게 이지메(괴롭힘)를 당하지 않았고, 점차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도바시 마사유키; 프리배팅 투수로 도에이에 입단, 백인천이 2군에 머물 당시 도에이의 에이스 투수로 독신이어서 숙소에서 함께 생활했다. 현재 ‘사와무라상’ 선발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1962년에 저팬시리즈 최우수선수로 뽑현던 명투수출신이다) 돌연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에서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출마가 주목받고 있던 이듬해인 1963년의 초여름. 도쿄 진구구장에서 1군의 타격 연습을 돕고 있던 백인천에게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입에서 “너도 쳐 봐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선배인 장훈의 배트와 헬멧을 빌려 쓰고 배팅 케이지에 들어섰다. 열심히 타격을 했다. 드디어 “좋아, 게임에 나가”라는 출전 명령이 떨어졌다. 마침 1군의 포수인 다네시게 마사유키와 안도 쥰조 두 명이 차례로 고장나는 바람에 생긴 긴급 조치였다. 6월 26일, 상대는 선두를 다투던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 백인천은 이 데뷔전에서 7회부터 마스크를 썼다. 다음날인 27일에는 선발 출장, 6회에 유격수 뒤쪽에 떨어지는 첫 안타를 날렸다. ‘일본 프로야구에 발자국을 남기게 됐다. 이제 그만두더라도 괜찮다’고 백인천은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후 백인천은 도쿠시마 쇼이치가 개인통산 1000안타 기념 표창장을 받는 것을 보곤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나도 앞으로 안타 999개 치겠다.’그것은, 은밀하고 대담한 결의였다.(경칭 생략) [번역 및 정리=OSEN 홍윤표 기자] 훈련 캠프에서 도에이 주축 타선을 이루고 있던 타자들(왼쪽부터) 이와시타, 오스기, 사노, 백인천, 오시타가 함께 모여 있는 모습(제공=산케이 신문) 【玄界灘を越えて】白仁天物語(2)北から逃れた一家 昭和37年、東映フライヤーズに入団した白仁天は、東京・駒沢の合宿所「無私寮」で生活を始めた。1年目はずっと2軍暮らし。外食もできず、それまで食べたことのない日本食にとまどった。例えばマグロの刺し身は血の塊にしか思えず、塩焼きにして口に入れたほど。満足に栄養を取れないまま猛練習に打ち込んだことで、73キロあった体重は58キロにまで落ちた。 「やっぱり日本の野球にはついていけないのかな」。体の衰弱だけでなく、日本語を話せないことが孤立感を強めた。唯一の話し相手は夜空にポッカリと浮かんだ月。素振りをしながら故郷の家族を思った。 白は18年11月、中国の上海に近い無錫(ウーシー)で生まれた。後に『無錫旅情』の歌で知られる街で、父の慶道は駐留する日本軍相手に劇場を経営。戦争が終わると一家は慶道の故郷、平安北道鉄山(現在は北朝鮮)へ引き揚げた。 ところが、まもなく慶道は「日本軍に協力した」疑いで、シベリア行きの貨物列車に乗せられてしまう。もし、そのまま父が抑留されたら白の人生はまったく違うものになっていただろう。この最大の危機を救ったのは見回りにきた係官。「なんで、あんたがここにいるんだ?」。知人だったおかげで列車から脱出。逆方向の南へと逃げた。 その後、家族も慶道を追って“越南”。ソウルの民家に間借りした8畳一間に、一家6人で暮らすことになった。付近は元の日本人街。空き家に革製の手袋のようなものが残されていて、「これは野球というスポーツで使うグラブだ」と大人に教えられた。見よう見まねで始めたキャッチボールが、白の長い野球人生のスタートとなった。 そうやって異国の地で苦労した父は、白が日本へ渡るときに、こんな助言を手紙にしたためて持たせた。「日本では人が嫌がる仕事を率先してやりなさい。そうすればみんなに好かれるはずだ」。月を見上げながら父の言葉を思いだした白は、「日本語の勉強にもなる」と合宿所の電話番を引き受けた。相手は先輩の恋人が多かったが、たどたどしい日本語での受け答えは好感を持たれ、「これを白君に」と先輩に土産を持たせてくれる女性もいた。 必死に言葉を覚えようと辞書を手放さず、電話番の合間に大鏡の前で素振りを繰り返す白。その姿を見て隣部屋の土橋正幸が感心した。「こいつは韓国からきて、こんなにがんばっている。お前らも少しは見習え」。エースが若手に説教してくれたこともあって“いじめ”もなく、白は次第になじんでいった。 チャンスは突然やってきた。韓国で朴正煕の大統領選出馬(メモ参照)が注目されていた翌38年の初夏。神宮球場で1軍の打撃練習を手伝っていると「お前も打ってみぃ」。監督の水原茂に命じられた。先輩、張本勲のバットとヘルメットを借りて打撃ケージへ。懸命に球を打ち返すと「よしっ、試合に出すぞ」。1軍の捕手、種茂雅之と安藤順三の2人が次々と故障したための緊急措置だった。 6月26日、相手は首位を争う南海ホークス(現ソフトバンク)。このデビュー戦で白は七回からマスクをかぶり、翌27日には先発して六回にショート後方へ落ちる初安打を放つ。「日本のプロ野球に足跡を残せた。もう辞めてもいい」。しかし数日後、毒島章一の通算1000安打表彰を見て、すっかり心を入れ替えた。「おれも、あと999本ヒットを打とう」。それは、ひそかで大胆な決意だった。=敬称略 ■朴大統領誕生 昭和36年5月、クーデター部隊を率いてソウルへ乗り込み、無血で国家権力を掌握した陸軍の朴正煕少将は、国家最高会議議長に就任。2年後の38年5月、同年10月に行われる大統領選への立候補を正式表明した。 出馬は「実質的な軍政の延長につながる」と激しい批判も浴びたが、選挙の結果、対抗馬の尹●善氏に15万票あまりの小差で勝利。日本の陸軍士官学校出身だった朴大統領は40年、日韓国交正常化を実現し、韓国発展の基礎を築い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