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볼이라는 생각에 공을 흘려보냈다. 상대팀인 긴테쓰 버팔로즈의 포수 쓰지요시키도 크게 벗어난 위치에서 공을 잡았다. 그런데…, 구심인 로자키 모토미가 “스트라이크, 아웃!”을 크게 외쳤다. “어떻게 그 게 스트라이크냐.” 도에이 플라이어즈에서 주전 자리를 꿰찼던 백인천은 로자키 구심을 손으로 쿡 찔렀다. 로자키 구심이 즉각 퇴장을 선언하자 백인천은 그의 목을 감아 넘어뜨렸다. 그 사건이 일어난지 이틀 후 백인천은 고소 당하게 된다.(고소는 곧 취소 됐다) 1970년 5월 23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렸던 야간경기. 도에이와 긴테쓰는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긴테쓰의 선발 투수는 그 전 해 여름철 고시엔대회의 스타였던 오타 고지(미자와고 졸업)였다. 스탠드에 3만 20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1회에 ‘사건’이 일어났다. “그대는 발끈하기 쉬워서 포수보다 외야 쪽이 맞다.” 4년 전, 당시 감독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도 백인천의 그런 성격을 꿰뚫어보고 외야수 전향을 지시했다. 강한 어깨와 파워넘치는 타격도 고려한 조치였다. 최고의 표본도 있었다. 같은 민족의 피가 흐르는 대타자, 장훈이 바로 그였다. 어느 해 시즈오카의 이토 캠프. 백인천이 한밤중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는데 넓은 방에서 “붕, 붕”하는 소리가 들린다. 슬그머니 들여다 보니 팬티 하나만 걸친 장훈이 정신을 집중해서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백인천은 선배에게 뒤지지 않는 ‘연습 벌레’가 될 것을 맹세했고, 피나는 노력 끝에 중견수로 자리를 잡았다. 1969년에는 처음으로 타격10걸(9위)에 들어가, 새로운 비약을 꿈꾸고 있던 참에, 병역 문제가 끓어올랐다. 당시 한국 남성은 20세부터 3년간 병역 의무가 있어, 현재처럼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선수에 대한 병역 면제도 없었다. 백인천의 도에이 구단 입단도 ‘2년 후 병역을 마친다 ’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일본에서의 활약으로 입대가 연기돼 있었을 뿐이었다. 한국에서는 병역기피를 노린 국회의원의 아들들의 해외유학이 사회문제로 떠올라 강제 귀국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백인천을 일본으로 내보내는 형국이 된 박정희 정권은 ‘특례를 인정해주면 어떤가’라는 비판의 소리도 듣고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부담을 느낀 나머지 백인천을 소환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백인천은 시즌을 마치고 귀국, 27세의 나이에 육군에 입대했다. 다시 일본 땅을 밟은 것은 이듬해인 1971년 5월1일,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다음이었다. 그러나 제대를 한 것은 아니었고 남은 병역기간(2년반) 동안 당시 한국중앙정보부(KCIA) 소속의 군인신분이었다. 일본 의회에서는 ‘다른 나라 첩보기관 소속의 사람이 어떻게 공공연하게 플레이를 할 수 있는가’하는 논란이 생겼고, 신문기자들에게도 이 일이 알려져 부담을 느낀 백인천은 그 해 타율 2할3푼8리로 부진했다. 심기일전, 반전을 꾀한 1972년 봄, 기쁜 일이 생겼다. 3월 29일, 고후에서 열렸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에서 백인천은 요미우리의 명투수 호리우치 쓰네오로부터 좌중간 2점홈런을 뽑아냈다. 백인천이 천천히 3루를 돌 즈음 “나이스 홈런”이라는 외침을 들었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백인천이 동경했던 나가시마 시게오였다. 경기를 마친 후 이동하던 도중 역에서 만나 인사를 했다. 나가시마는 백인천에게 “올해는 3할을 칠 수 있다. 열심히 해라”고 격려했다. 백인천은 하늘에라도 오른 기분이었다. 백인천은 ‘기분파’의 본령을 발휘, 그 해 하늘에도 오르는 생각의 흰색은“기분파”의 본령을 발휘, 그 해에 처음으로 3할대 타율(. 315, 리그 3위)를 기록했다. [번역 및 정리=홍윤표 OSEN 기자] 1970년 5월 23일, 도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경기 때 스트라이크 판정에 격노, 로기주심을 넘어뜨리는 백인천. 그 오른쪽에 백인천을 말리려고 달려나가는 오오스기(앞)와 장훈(안쪽)의 모습이 보인다. (제공=산케이 신문) 玄界灘を越えて】白仁天物語(3)兵役と退場劇 「軍人」としてプレー 自信を持って見送った球だった。近鉄バファローズの捕手、辻佳紀も大きく外れた位置で捕球している。ところが…。「ストライク、アウト!」。球審の露崎元弥が、得意のオーバーアクションでコールした。「どこを見とるんや」。東映フライヤーズでレギュラーをつかんでいた白仁天は露崎を手で突き、退場を宣告されると首投げまで見舞った。2日後、白は告訴されることになる(まもなく取り下げられた)。 昭和45年5月23日。後楽園球場のナイター、東映対近鉄は異様な雰囲気に包まれていた。近鉄の先発は、前年夏の甲子園のアイドル太田幸司(三沢高出)。スタンドに3万2000人のファンが詰めかける中、一回に“事件”は起きた。 実は試合前、気になる報道もあった。「韓国国防部が、白に徴兵検査を受けるよう召還命令を出した」との時事電。白は「兵役は韓国国民の義務。服従する」とコメントしたが、内心穏やかではなかった。召還通知が届けば、これが日本での最後の試合となるかもしれなかった。 「お前はカッとしやすいから、捕手より外野の方が向いている」。4年前、当時の監督水原茂もそんな白の性格を見抜き、外野手転向を命じていた。強肩とパワフルな打撃を生かすことを考えたのだ。 最高のお手本もあった。同じ民族の血が流れる大打者、張本勲だ。ある年の静岡・伊東キャンプ。白が夜中トイレに起きると、大広間で「ビュン、ビュン」と音がする。そっとのぞくと、パンツ一枚で一心不乱に素振りしている張本の姿があった。先輩に負けない練習の虫となることを誓った白は、血のにじむような努力でセンターの定位置を勝ち取った。 44年には初めて打撃十傑(9位)に入り、さらなる飛躍を目指していた矢先、兵役問題が蒸し返された。当時、韓国男性には20歳から3年の兵役義務があり、現在のように、スポーツの国際大会で好成績を挙げた選手に対する兵役免除もなかった。白の東映入りも「2年後兵役に就く」というのが条件。日本での活躍で入隊が延期されていただけだった。 母国では「兵役逃れ」を狙う国会議員らの子弟の海外留学が問題となり、帰国させる動きが出始めていた。白を日本に送り出す形になっていた朴政権には「特例を認めるのはどうか」という批判も集まり、大統領選を控えた時点で白を召還せざるを得なかった。 結局オフに帰国した27歳の白は陸軍へ入隊し、訓練に励んだ。再び日本の地を踏んだのは、大統領選で朴が三選を果たした後の翌46年5月1日。ただし除隊はせず、残る兵役期間(2年半)を当時の韓国中央情報部(KCIA)所属の軍人としてプレーした。「他国の諜報(ちようほう)機関の人間が公の場でプレーしている」。白の身分は国会でも取り上げられ、新聞記者にもつきまとわれたこの年は、打率・238という不本意な成績に終わった。 心機一転、巻き返しを図った翌47年春、うれしい出来事があった。3月29日、甲府での巨人とのオープン戦で白は堀内恒夫から左中間へ2ランを放つ。ゆっくりと三塁を回ろうとしたとき「ナイスホームラン!」。あの甲高い声。あこがれていた長嶋茂雄だった。試合後、移動途中の駅であいさつすると「今年は3割打てるよ。がんばれ」 天にも昇る思いの白は“気分屋”の本領を発揮。この年初の3割、打率・315(リーグ3位)をマークした。=敬称略 ■朴大統領三選 1971(昭和46)年4月27日投票の韓国大統領選で、朴正煕氏は634万票を獲得し、三選を果たした。対抗馬の野党・新民党、金大中氏は民衆政治家をキャッチフレーズに全国各地を遊説。ブームを巻き起こしたが、結果は539万票と意外な大差で敗れた。 与党・民主共和党の圧倒的な組織力と資金力の勝利とみられたが、各地の選挙では無効票や不正の発覚も相次いだ。与党側の選挙立会人が一度に10枚の投票用紙を事前投票して摘発され、開票所では束になった朴氏の票も見つかっ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