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할의 전설’ 백인천의 야구 이야기(4) 14년만에 수위타자, ‘훈장’을 달다
OSEN 기자
발행 2009.12.09 10: 04

최종 타율은 3할1푼9리2모-3할1푼8리7모. 그야말로 털끝같은 차이였다. 1975년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세이부 라이온즈 전신)에 이적했던 백인천은 불과 5모차이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시즌 막판에 오른손등에 공을 얻어맞아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규정타석에 모자라지 않으려고 경기출장을 강행했다. 타격은 왼손만으로 했다. 남은 8경기에서 규정타석을 채웠다. 그 때까지 “나갈 수 있는한 나가라”고 질타했던 에토 신이치 감독도 이젠 거꾸로 “쉬어라”는 엄한 지시를 내렸다. “잘 맞은 타구도 정면으로 날아가는 경우가 많다. 4타수 무안타가 되면 잘못되는 수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적을 되풀이하면서도 양 리그에서 수위타자에 올라봤던 경험이 있는 그의 말에는 무게감이 실렸다.   그 후, 니혼햄 파이터스의 오다 요시토가 추격해 왔지만 백인천은 리딩히터 자리를 빼앗기지 않은 채 페넌트레이스를 마쳤다. 영광의 관을 쓴 백인천은 “수위타자의 훈장은 평생 따라다니는 것이다. 감독말슴대로 해서 잘 됐다.”고 감사했다.   백인천이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도에이 플라이어즈는 한-일 양국을 뒤흔들었던 ‘김대중 사건’이 일어났던 1973년에 닛타구홈에 넘어갔고, 그 이듬해인 1974년에 다시 니혼햄이 모기업이 돼 팀 이름도 파이터스로 바뀌었다. 신생팀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니혼햄도 도에이 색갈이 강한 선수들을 차례로 방출했다. 백인천은 1975년에 도다 마사기와 함께 다이헤이요로 옮겼다. 같은 시기에 주축타자였던 오스기 카츠오는 야쿠르트로, 장훈은 1976년에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백인천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옛 팀에 전의를 불태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월 5일 시즌 개막전은 다이헤이요의 본거지인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열렸다. 백인천은 7회에 팀에 리드를 안기는 솔로홈런, 연장 11회에는 끝내기 내야안타를 날리는 등 3안타의 맹타로 시즌 출발이 좋았다.   그 해는 3년 전에 타격 코치 스기야마 사토루로부터 권유받은, 왼발을 올리고 타이밍을 잡는 타격 폼이 원숙한 경지에 접어들었다. 일찌기 선배인 장훈에게서 “볼을 피하면 안된다. 정면으로 맞서라”는 조언을 실천하고 있었다. 홈플레이트에 최대한 가깝게 까다로운 상대투수의 바깥쪽 공을 한복판 치기 좋은 공으로 이끌어들였고, 그동안 손을 댔던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변화구도 여유를 가지고 그냥 흘려보낼 수 있게 됐다. 좋은 투수와 맞상대하는 법도 단련 됐다. 특히 긴테쓰 버팔로즈의 좌완 에이스 스즈키 게이시와의 승부에 힘을 기울였다. 어느 해 스즈키에게서 전혀 안타를 뽑아내지 못했던 백인천은 “어째서 그럴까”하고 골머리를 앓자 기록원으로부터 “스즈키는 하쿠상(백인천)을 상대로 단 한 개의 스트라이크도 던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됐다.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에 손이 잘 나간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 게임에서 스즈키의 투구를 유심히 지켜보면 역시 모두 볼이었다. “이거야!”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으면 마운드의 스즈키는 ‘들켰구나’하는 생각에서 엷은 미소를 짓곤했다. 백인천은 1977년부터 4년간은 롯데 오리온즈(현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뛰었다. 수위타자를 획득한 뒤에도 타격 10걸 안에 3번 들어갔다. 한 획을 긋는 프로 20년째인 1978년에는 긴테츠로 이적했다.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고별 게임이 됐던 닛세이 구장의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대전에서는 이마이 유타로로부터 ‘전별’의 선제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백인천이 필요 이상으로 기뻐버하는 모습을 본 감독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너도 그만둘 생각이냐”고 추궁하자 “감독이 그만둔다면…”하며 말문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찡해졌다. 이 명장은 “앞으로 2, 3년은 다 해야돼”라는 격려의 말을 던졌다. 백인천이 일본 무대에서 20년간 쌓았던 안타수는 1831개. 통산 2000안타가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번역 및 정리=OSEN 홍윤표 기자] 백인천은 1975년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에서 퍼시픽리그 수위타자에 올랐다. 일본으로 건너간지 14년째에 처음으로 단 훈장이었다.(제공=산케이 신문) 【玄界灘を越えて】白仁天物語(4)14年目の首位打者 円熟味増し「勲章」  最終打率は「・3192」と「・3187」。昭和50年、太平洋クラブライオンズ(現西武)へ移籍した白仁天は、わずか5毛差で首位打者のタイトルを手に入れた。シーズン終盤、右手甲に投球を受けて骨折。規定打席(チーム試合数×3・1)不足にならないよう強行出場し、左手一本でヒットを打ち続けた。  残り8試合で最終規定打席数をクリア。すると、それまで「出られるんなら、出ろ」と叱咤(しった)していたプレーイングマネジャーの江藤慎一が、逆に「休め」と厳しく命じた。「いい当たりでも打球が正面を突くことがある。4打数ノーヒットなら下にぬかれるんだぞ」。自身も移籍を繰り返し、両リーグで首位打者に輝いた指揮官の言葉には重みがあった。  その後、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の小田義人に追い上げられたものの、トップのまま全日程終了。栄冠に輝いた白は「首位打者の勲章は一生ついてまわるもの。監督の言う通りにしてよかった」と感謝した。 白が長く在籍していた東映フライヤーズは、日韓両国を揺るがせる金大中事件の起きた48年に日拓ホームが買収。翌49年に日本ハムが親会社となり、チーム名もファイターズに変わった。新チームによくあることで、日本ハムも東映色の強い選手を次々と放出。白は50年に東田正義とのトレードで太平洋へ移った。同時期に主軸の大杉勝男はヤクルトへ、張本勲も翌51年に巨人へ出されている。 白の性格からして、古巣相手に燃えないわけがない。しかも4月5日の開幕戦は、本拠地平和台での日本ハム戦。七回に勝ち越しソロ本塁打、延長十一回にはサヨナラ勝ちを呼び込む内野安打を放つなど、3安打の猛打賞という絶好のスタートを切った。  この年は、3年前に打撃コーチの杉山悟から勧められた左足を上げてタイミングをとる打撃フォームが円熟味を増していた。さらには、かつて先輩の張本から「ボールから逃げちゃいかん。向かっていけ」と言われていたことも実践できた。本塁に近づいて立つことで苦手の外角球を真ん中の絶好球にして、手を出していた外の変化球を余裕を持って見送れたのだ。  好投手と対戦することでも鍛えられた。特に近鉄バファローズの左腕エース、鈴木啓示との勝負には力が入った。ある年、鈴木からまったくヒットが打てなくなった白が「どうしてだろう」と頭を悩ませていると、スコアラーから「鈴木は白さんに1球もストライクを投げていない」と聞かされた。  ボール球をうまく打たされていたと気づき、次の対戦で鈴木の投球を見送ると、やはりすべてボール。「これだ!」。思わず声に出すと、マウンド上の鈴木は「ばれたか」とばかりに照れ笑いしていた。 白は52年から4年間はロッテオリオンズ(現マリーンズ)でプレー。首位打者を獲得した後も打撃10傑に3度入った。区切りとなるプロ20年目、56年には近鉄へ移籍。西本幸雄監督の最後の試合となった日生球場での阪急ブレーブス戦では、今井雄太郎から“はなむけ”の先制ソロを放ってみせた。  ただ、白のあまりの喜びように老練な指揮官は不審がり、「お前も辞めるつもりやないやろな?」と問いつめると、「監督が辞めるんなら…」とポロリ。しかし、この名将は「あと2、3年はやらんといかん」と励ましてくれた。20年間で積み重ねた安打数は1831。通算2000安打がすぐそこに見えていた。 【用語解説】金大中事件  昭和48年8月8日、韓国で民主化運動を展開していた野党指導者、金大中氏が滞在中の東京のホテルで拉致され、5日後にソウルで解放された。現場から在日韓国大使館1等書記官の指紋が見つかるなど、当時の韓国中央情報部(KCIA)の関与が疑われたが、捜査は打ち切られた。  その後、韓国政府の「真相究明委員会」は中央情報部の組織的犯行だったと断定。また関係者証言から、元自衛隊員らが設立した調査会社が、金大中氏の所在確認に協力していたことも明らかとなった。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