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할의 전설’ 백인천의 야구 이야기(5) 최초 4할과 구속 파동,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OSEN 기자
발행 2009.12.11 11: 30

일본에서 프로 20년째 시즌을 마친 백인천은 한국 프로야구 원년이 된 1982년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취임했다. 개막전은 본거지인 서울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대전했다. 일본의 시모다 다케조 커미셔너, 존경해 마지않았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승리를 부른 홈런을 날렸다. 일본에서 열심히 했던 백인천은 ‘프로야구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팀을 이끌었고, 시즌이 끝났을 때 타율은 무려 4할1푼2리였다.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는 경이로운 타율로 수위타자에 올랐다. 그 전 해 개인통산 1831안타를 날려 2000안타 고지에 169개를 남겨놓고 있었던 백인천은 긴테츠 버팔로즈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니시모토 유키오로부터 “앞으로 2, 3년은 할 수 있다”는 격려를 받았다. 그런데 시즌 종료 직후에 부친이 별세, 장례를 치르기 위해 서울로 온 것이 그의 인생길을 바꾸었다. 이듬해에 발족하는 한국프로야구 창설을 주도하고 있던 멤버로부터 ‘도와 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일단 대답을 보류하고 후쿠오카에서 설립 됐던 개인후원회에 그 사실을 알리자 ‘그대가 일본에 올 수 있던 것은, 모국 덕분일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필요하다고 하니 가서 힘이 돼어 주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게 됐다. 후원자들이 말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MBC 청룡으로부터 감독 전임을 요청받았지만 ‘나 자신을 선수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 선수를 겸한 감독을 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했던 1983년 사생활로 인해 뜻하지 못한 봉변을 겪게 된다. ‘랑군 사건’이 일어났던 그 해 다른 여성과의 불륜 관계를 걸어 아내가 고소를 하는 바람에 ‘간통죄’로 구속된 것이다. 얼마 뒤 이혼을 하고 고소는 취하 돼 선수로 복귀했지만 힘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결국 1984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야구계를 한동안 떠나 골프웨어 수입 사업에 힘을 쏟았다. 다만 야구 열정은 식지 않았고 일본에서 배운 재산을 이번에는 감독으로만 발휘해 보고 싶었다. 많은 야구인생이 그러하듯이 백인천 역시 최초로 입단했던 도에이 플라이어즈 지도자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당시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은 ‘인내를 바탕으로한 지도력’이 특징이었다. 게임 중반까지는 찬스가 와도 미사와나 시마다같은 대타요원을 쓰지 않아 선수를 애달캐달케 했다. 하지만 ‘승부사’미즈하라 감독은 종반에 가서야 대타를 기용, 경기의 흐름을 일거에 바꾸어 백인천의 눈을 휘둥그레해지게 만들었다. ‘달을 향해서 쳐라’는 타격이론으로 유명한 이지마 자미 코치는 선수에게 지도할 때, 우선 선수에게 기분이 풀릴 때까지 의견을 말하게 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전하고 싶은 얘기를 정중하게 설명하면서 신뢰를 쌓았다. 홈런왕 오스기 카츠오 등을 기른 것을 눈여겨 봤던 백인천은 ‘일본식’팀 만들기를 작정하고 실천에 옮겼다. 5년의 공백을 지나 백인천이 야구계에 복귀한 것은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한 LG 트윈스의 감독을 맡아 전해 6위에 그쳤던 팀을 환골탈태시켰다. 미즈하라 감독의 지휘법을 보기 좋게 재현했다. 시즌 1위를 판가름 짓는 중요한 게임에서 2점 뒤진 9회에 대타를 내보내 기사회생의 동점 2루타를 날리게 했고, 다음 타자가 끝내기 안타를 날리도록 경기를 이끌었다. “나는 네 한 방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고 백인천은 베테랑 대타자의 손을 잡았다. 백인천은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4연승, 패권을 거머쥐었다. 처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감독인생도 굴욕에서 벗어나 대역전 승리를 거둔 것이다. [번역 및 정리=OSEN 홍윤표 기자] 한국 프로야구 MBC 청룡의 초대 감독으로 결정난 백인천이 1981년 12월 서울 시내에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있다. (제공=산케이신문) 【玄界灘を越えて】白仁天物語(5)“大逆転”で韓国一の監督へ  日本でプロ20年目を終えた白は「韓国プロ野球元年」となった翌1982(昭和57)年、MBC青龍の選手兼任監督に就任した。記念すべき開幕戦は3月27日、本拠地ソウルでの三星ライオンズ戦。日本から下田武三コミッショナー、あこがれの長嶋茂雄が駆けつける中、勝利を呼び込むホームランを放った。  その後も「日本でがんばってきた自分が、『プロ野球とはどんなものか』を見せたい」という一心でチームを引っ張り、シーズン終了時の打率は・412。今も破られていない驚異的な数字で首位打者に輝いた。   前年まで日本で1831安打。通算2000安打まであと169本と迫っていた白は、近鉄バファローズ監督を退く西本幸雄から「あと2、3年はやれ」と励まされていた。ところが、最終戦終了直後に父の慶道が死去。葬儀のためソウルへ駆けつけたことが、その後の人生を変えた。  翌年発足する韓国プロ野球の設立メンバーから「白さんの力を貸してほしい」と懇願されたのだ。返事を保留し、福岡に設立されていた個人後援会へ報告すると、意外にも帰国を勧められた。「あなたが日本に来られたのは、母国のおかげでしょう。あちらが苦しい時期に必要とされているなら、力になってあげなさい」。支援者の言葉が心にしみた。 MBC青龍からは監督専任を要請されたが、「自分を生きた見本にして」と選んだプレーイングマネジャーで成功。ところが、三美スーパースターズに選手兼任コーチで移籍した翌83(同58)年、私生活でつまずく。ラングーン事件のあったこの年、別の女性との不倫関係を妻から「姦通罪」で告訴され、身柄拘束されてしまった。  まもなく離婚によって告訴取り下げとなり、選手として復帰したが、力は戻らなかった。翌84(同59)年に現役引退。球界から離れ、ゴルフウエアの輸入販売事業に力を注いだ。ただし野球への情熱は失わず、日本で学んだ財産を今度は監督専任で生かしたいと思うようになった。  多くの野球人がそうであるように、白も最初に入団した東映フライヤーズの指導者から受けた影響が大きかった。監督の水原茂は、がまんの采配(さいはい)が特徴。ゲーム中盤まではチャンスが訪れても三沢今朝治、島田雄二ら代打の切り札を使わず、ベンチをやきもきさせた。だが「勝負師」と呼ばれた水原は、終盤にズバッと代打を起用。手駒も期待に応え、「さすがは水原さん。試合の流れを読んでいる」と白の目を見張らせた。 「月に向かって打て」というアドバイスで有名な打撃コーチの飯島滋弥は、選手に指導する際、まず選手に気の済むまで自分の意見を述べさせた。その上で自分の伝えたいことを丁寧に説明。信頼関係を築いていった。本塁打王の大杉勝男らを育てたこの名伯楽のやり方を含め、白は“日本流”のチーム作りを韓国で実践しようと決意した。   5年のブランクの後、白が球界復帰したのは90(平成2)年。古巣のMBCが身売りし、衣替えしたLGツインズの監督として、前年6位のチームを生まれ変わらせた。  水原の采配も見事に再現する。シーズン1位の行方を左右する重要な試合で、2点を追う九回に代打の切り札を送り、起死回生の同点二塁打。次打者のサヨナラ打につなげた。「おれはあんたの一打を一生忘れないよ」とベテラン代打の手を握った白は、韓国シリーズでも三星を4タテ。初の韓国一に輝き、監督人生でも屈辱からの大逆転勝利を収めた。=敬称略 ■ラングーン事件 1983(昭和58)年10月9日、ビルマ(現ミャンマー)の首都・ラングーン(ヤンゴン)のアウンサン廟で爆発があり、同国を公式訪問していた韓国政府要人の徐錫俊副首相兼経済企画院長官や李範錫外相ら韓国人17人を含む21人が死亡。多数の重軽傷者も出た。  当時の全斗煥大統領も参拝を予定していたが到着が遅れて助かった。ビルマ政府は後に逮捕した容疑者2人について「北朝鮮の工作員」と発表。北朝鮮はこれを否定し、「事件は韓国の自作自演である」との声明を出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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