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 투수의 기량을 숫자로 대변하는‘세이브’라는 통계항목은 1969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관련규칙을 제정해 적용하기 시작한 현대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기록조항이다. (일본프로야구는 1974년부터 세이브 채택) 그러면 제정 당시만 해도 상당히 낯설었을‘세이브’항목의 필요성이 현대야구에서 서서히 대두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1890년에서 1911년까지 무려 개인통산 511승을 올리며 미국야구를 평정했던 전설적 투수‘사이 영’(본명은 덴튼 트루 영)의 749경기 완투기록에서 보듯 과거의 야구는 뛰어난 투수 혼자 경기 전체를 책임지는 식의 분업화되어 있지 않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근대야구에서 차지하는 구원투수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이를 계기로 1960년 스포츠 관련 언론사인 가 각 리그 최고의 구원투수를 뽑아 ‘올해의 소방수’상을 수여하기 시작하자, 마무리 구원투수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공식적인 통계자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메이저리그가‘세이브’라는 구원투수에 관련한 통계기준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기록을 수치화시킨 것이다. (참고로 공식기록상 최초 세이브를 기록한 투수는 1969년 4월 7일 대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세이브를 따낸 LA 다저스의‘빌 싱어’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76년 한 제약회사가 자사제품 홍보를 목적으로 약 이름을 따서 붙인‘롤레이즈 포인트(단순한 세이브 숫자가 아닌 상황에 따른 구원성공과 실패를 점수로 환산)’를 바탕으로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결정하는 ‘롤레이즈 구원상’제도를 새로 만들며 기존의 세이브 숫자만을 근거로 시상하고 있는 구원투수상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접근 어필하는데 성공,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구원투수의 세이브 숫자는 해당 구원투수의 역량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드러내주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러한 탄생 배경을 갖고 있는 세이브 규칙은 작은 야구규칙서 한 페이지의 채 반도 채우지 못할 만큼 아주 간단한 몇 줄의 글로 나열되어 있지만, 그 속을 파고들어 보면 그리 간단하게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도 제법 많다. 세이브 규칙이 의외로 복잡할 수 있다는 자칫 길어질 수 있는 위험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세이브 규칙 중 가장 간단하게 답이 나오는 것에 관해 그 안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세이브는 대개 점수차가 박빙일 때 구원투수가 등판해 리드하던 경기를 끝까지 책임졌을 경우에 그 구원투수에게 주어지는 기록이지만, 그러한 목적과는 동떨어진 절실하지 않은 상황의 세이브도 종종 나타난다. 세이브 관련규칙의 가장 끝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들어있다. 1)승리한 경기를 마무리한 투수 중에서 2)승리투수로 기록되지 않은 투수 가운데 3)최소한 3회 이상 효과적으로 투구하였을 경우, 그 투수에게 세이브가 주어진다고. 규칙 중에서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한 조항이다. 그렇지만 현대 야구에서 자리잡은 세이브의 숨은 의미는 오래 전에 만들어진 당시 세이브 규칙 제정 의미와는 그 성격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마무리 투수의 등판시기는 상당히 이른 편이었다. 7회나 8회 등판은 다반사고 6회에 마운드에 오르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다 보니 3이닝을 훌쩍 넘겨 4이닝씩이나 던지고 세이브 기록을 가져간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심지어는 최다 투구이닝 세이브 기록으로 남을 5⅔이닝 투구 세이브 기록도 눈에 띈다. 1982년 7월 17일 좌완 유종겸(MBC)이 인천구장 삼미전에서 거둔 기록으로 팀이 큰 점수차로 리드하던 4회에 등판해 끝까지 투구, 세이브로 기록된 바 있다. 웬만한 선발투수보다 더 많은 투구이닝이다. 그러나 최근의 야구는 세이브 전문 투수를 가능한 한 아껴 활용하는 쪽으로 그 흐름이 변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메이저리그에 비하면 여전히 한국프로야구 마무리 투수들의 투구이닝은 긴 편이지만, 마지막 이닝이 아니면 위기가 닥치더라도 마무리전문 투수를 마운드에 선뜻 올리려 하지 않는다. 다급해서 일찍 마운드에 올린다 해도 8회 이전은 더더욱 아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물론 투수를 혹사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도 들어있지만, 오늘뿐만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대비 역시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페넌트 레이스 운영의 장기적인 포석상 마무리 전문 투수를 무리하게 기용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점수차가 크게 벌어져 승패가 거의 판가름 난 경기에서 7회 이전의 중반에 등판한 투수가 끝까지 마운드에 남는 경우가 가끔 생기는데, 이때 해당 투수가 챙겨가는 세이브 기록은 실질적인 구원의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다. 2007년부터 공식기록으로 집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블론 세이브(구원 실패)' 적용기준을 7회 이후부터 등판한 투수에게만 한정해서 적용하고 있는 이유도 그 이전(5~6회)에 등판한 투수들의 임무 성격상 세이브를 목적으로 등판한 것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1일 SK의 고효준은 넥센과의 경기에서 선발 엄정욱의 뒤를 이어 7-1로 리드하던 6회에 등판해 4이닝을 던지며 세이브를 따낸 바 있는데, 이날 고효준의 투구는 전문 마무리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기량 점검이나 팀 불펜 진의 전력비축 차원에서 긴 이닝을 맡아 투구하게 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한편 지난해‘4이닝 투구 세이브’기록은 모두 3차례 작성된 바 있다. SK의 이승호와 전병두, 히어로즈의 송신영 등이 각각 한 번씩 롱 세이브 기록을 남겼는데, 최근 SK의 좌완 투수들에게 4이닝 세이브 기록이 우르르 몰려있다는 사실이 무척 이채로워 보인다. 이 부분은 SK의 투수 운용방식이 다른 팀과는 차별화된 패턴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긴 하지만, 현대야구가 고집하는 일반적인 마무리 기용패턴의 흐름과는 그 결이 사뭇 다른 대목이라 하겠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