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얼굴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종범이 1998년 소속 팀 해태 타이거즈의 우리를 박차고 대한해협을 너머 일본으로 떠나던 날도,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호 홈런의 후광을 안은 이승엽이 2004년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삼성 라이온즈의 품을 벗어나 바다 위를 날던 그 날도 그랬었다.
‘한국프로야구사에 불멸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선수였는데…. 참 아쉽다!’
정말 그랬다. 한국 무대가 너무 비좁다고 생각될 만큼 출중한 기량을 가졌던 그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선진야구를 향해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사실은 그 지원동기야 어떻든 간에 박수를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 것은 한국프로야구의 기록사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눈물을 의미하는 불행한(?) 사건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프로야구 개인 통산 최다안타와 홈런기록은 모두 양준혁(삼성)이 보유하고 있다. 6월 17일 기준으로 2317개의 안타와 351개의 홈런(18시즌)을 기록 중이다.
부질없는 가정일까? 만일 이종범과 이승엽이 해외로 진출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나갔더라면 통산 타격기록 부문에 있어 지금과 같은 양준혁의 외로운 독주는 불가능했을는지 모른다.
1993년 양준혁과 같은 해에 프로에 데뷔한 이종범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인 1997년 시즌까지 5년간 때려낸 총 안타수는 713개(551경기). 606경기로 출장경기수가 이종범보다 55경기 많았던 양준혁(691안타)보다도 오히려 안타수는 22개나 앞서 있었다.
그러나 양준혁이 국내에서 3할을 웃도는 고 타율로 매년 150개 내외의 안타를 더해가며 성큼성큼 타조걸음을 걷는 동안, 타지의 이종범은 타격부진과 부상으로 점철된 3년 반(1998~2001년 전반부)을 보내며 총 286안타(310경기)만을 추가하는데 그쳐 기록의 미아(?)가 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미완성으로 끝난 꿈을 접고 국내로 복귀하던 2001년, 그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32살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이었고, 더욱이 타고난 순발력과 민첩성을 무기 삼아 그라운드를 휘젓던 이종범에게 있어 세월의 무게란 그 어떤 환경보다도 이겨내기 어려운 난제로 보였다.
그러나 이종범은 비록 전성기 때 만큼의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2001년 해태의 후신인 KIA로 복귀한 이후 10년 동안 주전으로, 때로는 벤치 멤버로 개인기록보다는 팀의 10번째 우승을 위해 매진했고 마침내 지난해(2009년)에는 한국시리즈를 통해 숙원처럼 여겨지던‘V10’의 꿈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종범의 안타수도 야금야금 불어났다. 6월 17일 현재 그가 기록하고 있는 국내프로야구 개인 통산 총 안타수는 1704개. 은퇴시기를 저울질해야 하는 40줄에 올라선 나이를 감안할 때 통산 2000안타는 고사하고 여기에서 더 추가할 수 있는 안타수는 분명 한계가 있는 상황이지만, 이종범은 이미 밝힌 대로 ‘2000안타’의 또 다른 꿈을 향해 한발한발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바로 일본에서 담아온 286안타가 있기 때문이다. 1704안타에 286안타를 더하면 1990안타가 된다. 2000안타에 꼭 -10이다. 그의 꿈이 드디어 카운트다운에 들어선 것이다.
물론 이종범이 10개의 안타를 더 쳐내 2000안타 고지에 오른다 해도 양준혁과 전준호 단 2명만이 등록되어 있는 한국프로야구 기록사의 2000안타 클럽에는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다.
2009년 출범한 대기록을 세운 선수들의 모임인 성구회에는 정식 회원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겠지만,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2000안타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이는 그가 활약한 리그가 한국과 일본,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종범의 2000안타 속에 들어갈 286안타는 공식적인 인정여부를 떠나 상당히 가치 있는 부산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보다 수준이 높은 일본프로야구에서 어렵게 얻어낸 기록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9년간(1995~2003년) 324홈런을 기록한 이승엽이 2004년 일본으로 건너가 76홈런을 보태 대망의 개인통산 400홈런(2006년 8월) 고지에 올랐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와 비슷한 예는 과거 이종범과 비교되던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본프로야구 오릭스에서 1278안타를 기록한 뒤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이치로가 빅리그 진출 8년만인 2001년, 1722번째 안타를 때려내며 미· 일 개인통산 3000안타 고지에 올랐던 일이다.
현재(6월 16일) 메이저리그 통산 2121안타를 기록 중인 이치로의 연간 200안타 페이스를 감안하면 3, 4년 뒤에는 미· 일 개인통산 4000안타를 넘어 피트 로즈가 보유하고 있는 개인통산 4256안타의 통산 최다안타 기록마저도 따라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40세를 넘겨서도 지금과 같은 기량을 여전히 보여줄 수 있을 지가 대기록 수립의 관건이 되겠지만)
지금 세계야구의 격차는 점점 좁혀져 가고 있다. 지구가 글로벌화 되면서 서로가 한데 섞여 기량을 겨룰 기회가 늘다 보니 실력들이 하나로 동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 간격은 더욱 더 좁혀지게 되어 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이 한창이지만 축구를 봐도 그렇다.
우리가 올림픽이나 WBC에서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야구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이유도 외국인 선수들을 우리무대로 영입해 맞부딪쳐보고, 일부 능력 있는 선수들이 넓은 세계로 눈을 돌려 과감한 도전을 끝없이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이종범의 이번 기록도 그런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비록 야구 기록집이나 연감에 이종범의 2000안타가 공식적으로 등재될 자리는 없겠지만, 그의 이 기록은 단순한 2000개의 안타가 갖고 있는 수량적 의미를 넘어 개인과 한국야구의 위대한 도전을 담고 있기에 그 의미가 아주 각별하다 하겠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