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링 히트’라는 진기록 앞에 언제나 가장 큰 걸림돌로 다가오는 것은 홈런보다 3루타다. 힘으로 해결되는 홈런과는 달리 되도록이면 타구가 외야수와 거리가 먼 좌,우중간이나 양쪽 파울 선상부근으로 날아가는 운이 따라줘야 하는 것은 물론, 3루까지 파고들 만큼 타자주자의 빠른 발도 요구되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1991년도 한국시리즈 MVP였던 포수 장채근(당시 해태타이거즈)은 현역선수 생활 10년(1986년~1995년)동안 100개에 가까운 홈런(97개)을 쳐냈을 정도로 무서운 장타력을 과시했지만 3루타는 단 한 개도 기록하질 못했다. 그만큼 발이 빠르지 않으면 만들기 힘든 것이 3루타인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프로야구에서 어렵다는 3루타의 고비를 넘어 빛을 본 사이클링 히트는 모두 14번. 반면 3루타가 빠져 사이클링 히트가 무산된 경우는 이보다 몇 배는 많다.

그런데 3루타에 도전이라도 해보고 실패했다면 몰라도 아예 기회를 가져보지 못하고 중도에 물러난다면 타자로서는 크게 미련이 남을 터.

7-3으로 앞서가던 LG의 8회말 공격이 시작될 즈음, 1루측 응원단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바로 선두타자로 나설 2번 지명타자 이진영 때문이었다. 이진영은 1회말 첫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낸 뒤 단타(2회말)와 2루타(6회)를 추가, 사이클링 히트에 도전해 볼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진영은 타석에 들어설 수 없었다. 상대 팀 롯데가 투수를 좌완 허준혁으로 교체하는 수싸움에 맞서 LG가 대타 이택근을 기용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LG 벤치에서 이진영의 기록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이닝만 막아내면 되는 상황에서의 3점차라면 그런대로 여유를 가질 만도 한 리드였을텐데.
이후 아쉬운 상황을 더욱 아쉽게 만든 것은 대타 이택근의 타구였다. 좌중간을 꿰뚫어 담장까지 굴러가는 여유있는 2루타. 만일 3루타가 필요한 이진영이었다면 죽으나 사나 무조건 3루까지 파고들 가치가 충분해 보이는 타구였다. 당연 이택근이 아니라 이진영이었다면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서로의 그림이 얽혀 자꾸만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상은 지난 6월 18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이진영보다 3루타를 앞에 두고 더 아쉬워해야 했던 기억속의 선수가 있다. 근성의 야구로 대표되던 ‘악바리’ 박정태(현 롯데 2군 감독)다.
2001년 5월20일 인천(옛날 인천 도원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서 롯데의 박정태는 한스런 망각 때문에 사이클링 히트라는 대어를 스스로 발로 차 버리고 만 일이 있다.
박정태는 그날 2회초 첫 타석에서 SK 선발 좌완 이승호에게 좌전안타를 뽑아냈다. 이어 두 번째 타석에선 좌중간을 빠지는 2루타를 날렸고, 4회초 세 번째 타석에선 좌익수쪽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터뜨렸다.
이제 남은 것은 3루타. 경기가 중반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6회초 네번째 타석에 나와 내심 3루타를 의식했지만 욕심과는 달리 좌전안타. 경기 흐름상 남은 기회는 한번으로 좁혀졌다.
8회초, 박정태는 팬들의 기록을 의식한 뜨거운 박수 속에 타석에 들어섰다. 박정태의 배트가 힘있게 돌았고 타구는 좌중간 상공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 포물선이 상당히 높게 형성되어 잘못하면(?) 홈런이 될 수도 있는 타구였다. (당시 인천 도원구장은 좌우측 펜스거리가 91m밖에 되지 않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구장이었지만, 대신 철망이 외야 담장 위로 높게 둘러쳐져 있어서 웬만큼 타구가 높이 뜨지 않으면 철망에 맞아 넘어가기가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박정태의 타구는 팬들의 열망에 부응하듯 철망 상단에 걸리며 좌익수와 중견수 사이에 떨어졌다. 박정태는 타구가 철망에 맞을 무렵, 2루에 거의 다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2루를 돌아 3루까지 진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고, 수비측이 타구를 주워 3루로 송구를 한다 해도 타자주자를 잡기엔 시간적으로 많이 늦어보이는 정황이었다.
점수도 롯데가 8회초 현재 14-8로 리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박정태 개인기록을 위해 설령 아웃될 가능성이 높다 하더라도 3루까지는 무조건 돌진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박정태의 주루플레이가 펼쳐졌다. 2루쪽으로 질주하던 박정태가 2루에 거의 다다를 무렵 속도를 줄여 천천히 2루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박정태는 3루타만 치면 사이클링 히트라는 사실을 순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태가 무리하지 않고 2루에서 멈춰서려는 순간, 3루에 있던 주루코치가 계속 뛰라는 고함을 질러댔고, 덕아웃 쪽에서도 선수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손짓으로 3루까지 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등 난리 법석이 일었다.
그제서야 상황을 인지한 박정태는 2루를 출발, 3루로 뛰기 시작했지만 때는 늦었다. 송구가 이미 중계플레이를 위해 내외야 중간쯤에 나가 있던 유격수 브리또에게 전달되어 있었다.
남은 희망사항은 한가지 뿐. 유격수의 송구가 한쪽으로 치우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외야로 나간 내야수의 중계플레이를 위한 내야로의 송구는 악송구가 된다 하더라도 거리가 상당할 경우, 일반적으로 실책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과 달리 야속하게도 브리또의 송구는 정확하게 3루수에게 전달되었고, 3루수 안재만은 공을 잡고 박정태를 두 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늦었음을 깨달은 박정태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까지 시도하며 3루로 들어가 보았지만 허무한 태그아웃.
아웃된 박정태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꿇은 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마음에 헬멧을 벗어 땅을 치며 후회감을 드러냈지만 이미 상황은 모두 끝나 있었다.
일생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 한 사이클링 히트(성공했다면 통산 9번째)의 여신은 박정태를 그렇게 외면했다. 그후 박정태는 결국 사이클링 히트 기록 수립자 명단에 끝내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2004년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했다.
요즘도 가끔 기록집을 뒤적이다 역대 사이클링 히트에 관한 기록을 접할 때면 박정태의 이름이 자꾸만 다른 선수이름 위로 오버랩 되곤 한다. 아마도 필자의 손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록하나를 잃어버린 느낌이 당시에 너무 강했던 때문인 것 같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