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국프로야구에서 무관심 도루(진루) 조항을 적용키로 결정했을 무렵, 가장 큰 고민은 무관심 도루 판단의 기준점을 과연 어디다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무관심 도루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도루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고 나선다면 현장에서 좋아할 리는 만무했고, 그렇다면 무관심 도루로 기록한 이유가 납득할 만큼의 설득력을 지녀야 하는데 그 기준마련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알다시피 도루는 그 목적과 이유도 가지가지이고 상황에 따른 도루시도 감행조건도 아주 복합적이다. 따라서 어느 이닝 또는 몇 점차 일 때부터 도루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못박아 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기상황이나 해당 경기의 흐름에 따라 큰 점수차가 별 것 아닌 경우도 있고, 1, 2점 차이가 부담백배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긴 시간 많은 가정을 두고 무관심 도루 판단기준의 범위를 조금씩 좁혀나가는 과정을 밟았고, 공식기록원의 주관적인 판단이 주가 될 수 밖에 없긴 하지만 한국프로야구만의 무관심 도루 적용 기준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현재 한국프로야구의 무관심 도루 적용은 크게 나누어 4가지의 관점에서 마련된 기준을 따르고 있다.
첫째는 야수의 플레이다. 1루수가 1루에 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루에 들어가 있지 않고 주자가 없을 때처럼 수비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상태가 전제되어야 하고, 루상의 주자가 다음 루로 뛰는데도 포수가 송구할 생각이 전혀 없어야 한다. 아울러 주자가 진루하고자 하는 루에도 송구를 받아야 할 야수가 들어가지 않는 형태의 무관심이 동반되어야 한다.
둘째는 경기상황적 측면이 고려된다. 점수차가 상당히 벌어진 관계로 수비측이 주자들의 움직임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우선 해당된다. 이는 승부의 추가 너무 기울어 한쪽이 사실상 백기를 들었을 경우에 종반 이닝에서 보여지는 그림으로, 다만 점수차가 크다 하더라도 경기 초 중반에는 무관심 도루의 적용을 가급적 제한하고 있다.
셋째는 주자의 주루플레이를 분석한다. 수비측이 아무런 제지행위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루로 뛰었다거나, 다음 루를 향한 주자의 플레이가 전력질주의 형태가 아닌 설렁설렁한 걸음걸이였다면 무관심 도루의 적용을 깊이 고민한다. 돌려 말해 주자의 플레이가 최선을 다한 플레이였느냐를 재고해본다는 것이다.
넷째는 기록원의 판단적 측면이다. 경기 후반 점수차가 큰 상황에서 도루를 시도한 주자의 플레이가 야구정서상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한 의미없는 도루였다고 한다면 무관심 도루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크게 이기고 있는 팀에서의 행위라면 더욱더 문제가 된다.
그러나 도루를 시도한 주자가 도루와 관련된 타이틀이나 기록을 의식해 뛰었다면 어느 정도는 융통성 있는 적용을 염두에 둔다.
이상 네 가지의 무관심 도루 판단기준은 어느 한 가지에 해당된다고 해서 무턱대고 무관심 도루로 적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기정황과 야수와 주자의 플레이, 여기에 기록원의 경기 흐름 해석이 두루 가미된 후라야 무관심 도루로 기록될 수 있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추신수(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9월 20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전 9회초 도루를 분석해보자.
추신수는 6-4로 앞선 9회초 2사 3루에서 고의4구로 걸어나간 뒤, 이어진 공격에서 2루로 뛰어 2사 2, 3루의 상황을 만들었었다.
먼저 추신수의 도루 시도 때 캔자스시티 야수들의 플레이는 어떠했는가를 보자. 1루수가 1루를 떠나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얼마든지 투수의 견제구 처리가 가능한 위치였다. 포수 역시 추신수의 도루시도에 투구를 받은 뒤 2루에 송구하려는 동작을 취했지만 2루에 아무도 베이스커버를 들어오지 않자 포기한 상황으로 이상 관련 야수들의 플레이를 기준으로 볼 때 추신수의 도루는 무관심 도루로 기록되기에는 상당 부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다음은 경기상황적 측면이다. 6-4의 리드는 아무리 상대가 단 한 번의 공격기회만을 남겨놓은 상태라 하더라도 결코 승리를 낙관할 수 없는 근소차의 리드일 뿐이다. 후속 타자의 단타에 3루주자 한 명만 득점(3점차)하는 것보다 2루로 진루해 1점이라도 더 도망(4점차)갈 기회를 갖는 것이 보다 상대의 추격권에서 멀리 달아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으로서 성격상 무의미한 진루로 볼 수 없다.
그러면 주자의 주루플레이는 어떠했는가? 추신수는 정상적인 수비 시프트 하에서 2루로 전력 질주했고 더욱이 2루에서는 훅 슬라이딩까지 시도한 최선을 다한 주루플레이였다.
이상의 정황을 종합하면 앞서 말한 무관심 도루로 기록되기 위한 세 가지의 전제조건 그 어느 것 하나도 충족되는 것이 없는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무관심 도루,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무관심 진루로 기록된 것일까?
그것은 마지막 판단 조건인 기록원의 주관 때문이었다. 당시 공식기록원은 추신수의 2루 도루를 무의미한 진루로 해석했다. 2루에 베이스커버를 2루수나 유격수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 우선 크게 부각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별 견제도 받지 않고 2루까지 진루한 추신수의 도루에 대해 수비측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흔히 1, 3루 상황에서 1루주자의 2루진루가 거저 먹는 식의 도루로 기록되는 일이 있다. 수비측이 송구조차 못하고 그대로 구경만 하는 식인데 속을 들여다보면 3루주자의 득점이 우려되어 선뜻 2루에 공을 던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1루주자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3루주자를 의식해서 후위주자에 대한 구체적인 수비행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의 규칙집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한국이나 일본 프로야구 규칙집에는 바로 이 상황(주자 1, 3루 상황)을 지목해 무관심 도루 판단시 주의해야 할 사항으로 따로 명시하고 있다.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기록원의 판단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그림은 그렇지만 그 그림에 담긴 선수들의 의도나 상황의 필연성을 읽어내야 하고, 읽어낼 수 있도록 집중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엉뚱한 오판을 막는 지름길이다.
생각하는 야구. 선수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였지만 이번 추신수의 무관심 도루 적용 후 번복 해프닝은 올바른 기록 적용의 판단과 자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기록원들에게 일깨워 줄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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