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열리는 날이면 꼭 빠지지 않는 이벤트가 하나 있다. 바로 홈런레이스다. 당연 누가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내는가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게 되지만, 정작 홈런레이스 결과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홈런 치기 편하도록 공을 던져주는 배팅볼 투수라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실제 투수 마운드에서가 아닌, 가까이 다가서서 던져대는 배팅볼이 보기에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타자의 입맛에 맞는 속도와 제구력을 잘 버무려 던져주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훈련 중 여유시간이 생긴 아무 선수나 코치가 대충 던져주면 되는 그런 단순 기능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각 팀들은 경기를 앞두고 예고된 상대 선발투수와 비슷한 유형의 투구를 미리 만나보고 적응하기 위해 특화 지정된 배팅볼 투수들을 따로 지명해 전력증강에 활용하고 있는데, 배운용(삼성) 기록원의 프로 구단 첫 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년 전 그는 배팅볼 투수, ‘훈련보조원’이라는 이름의 신분이었다.

지난 11월 29일 늦은 밤, 삼성 라이온즈의 덕아웃 기록을 담당하고 있는 배운용 기록원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그의 나이는 불과 마흔 둘. 부모님의 타계 소식을 전하기에도 젊다 할 수 있는 나이인데 듣는 사람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본인의 사망 부음이었다.
특히나 매년 이맘때면 열리곤 하는 KBO 공식기록원과 각 구단 기록원들의 만남 자리인 합동 기록세미나를 불과 십여일 앞둔 시점에서 날아든 비보는 놀란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만들었다.
순박한 얼굴의 배운용 기록원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어느 2군 경기장에서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꿈을 안고 훈련보조원의 자격으로 프로세계에 뛰어들었던 그는 이후 선수가 아닌 기록과 관련된 업무로 전환, 연륜을 쌓아 1990년대 초반부터 삼성 1군의 덕아웃 기록을 맡아오고 있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 삼성의 선동렬 감독을 비롯, 경기가 있는 날이면 늘 감독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한결 같은 모습으로 저마다 개성이 다른 여러 감독들을 완벽하게 보필해 왔을 만큼, 그 성실성과 업무능력을 크게 인정받고 있는 기록원이었다.
1990년대 초 우용득 감독을 비롯, 백인천 감독-조창수 감독대행-서정환 감독-김용희 감독-김응룡 감독 등 그가 지켜온 자리는 곧 삼성 라이온즈의 현대사이기도 했다.
국내 프로야구의 특성상 구단 기록원이라는 자리는 단지 기록업무만을 맡아 다루면 끝인 자리가 아니다.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체크하고 그에 따른 개인별 고과자료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서두에서 말했듯 배팅볼을 던져주거나, 선수들의 연습을 도와 그라운드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공을 줍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방수포를 깔거나 그라운드에 고인 물을 짜내고 진흙을 걷어내느라 젖은 흙투성이가 된 바짓단을 걷어 올려야 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날이면 나이 어린 선수들의 투정이나 짜증을 들어주며 마음을 풀어주는 형 노릇을 해주는 일도 사람좋고 경험많은 덕아웃 기록원이 해야할 몫이다. 그래서인지 구단 기록원들과 친 형제처럼 호형호제하며 격의없이 지내는 선수들을 만나는 일은 야구계에서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황망한 마음을 달랠 여유도 없이 초췌한 얼굴로 문상객을 맞는 삼성 라이온즈 관계자들을 비롯, 해외 마무리 훈련 중, 조문을 위해 예정된 귀국 일정을 급 변경해 고 배운용 기록원의 빈소를 찾은 여러 선수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그가 평소 어떤 삶을 살아왔는 지를 헤아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아낌을 받아왔던 배운용 기록원의 세상과의 마지막 인사는 너무도 조용하고 쓸쓸했다. 몸에 이상을 느껴 혼자 스스로 병원을 찾았던 그는 반나절도 안돼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후 몇 시간만에 그렇게 세상과 차디찬 이별을 했다. 사랑하는 가족에 작별인사 한마디 없이.
아빠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직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 세 자녀를 남겨두고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야 했을까. 그가 남긴 생전의 좋은 모습들을 회상하던 사람들의 마지막 한 마디가 가슴을 저몄다.
“나쁜 사람….”
TV중계가 있는 날, 가끔씩 카메라가 감독의 표정을 잡기 위해 포커스를 덕아웃에 맞출 때면 선수는 아닌 듯 싶은 한 남자가 감독과 함께 화면에 잡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야구팬이라면.
고 배운용 기록원을 추모하는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그의 사진은 바로 덕아웃 그 자리에 앉았을 때의 모습이다.
기록세미나를 찾을 배운용 기록원의 명패를 만들기 위해 저장해 놓은 컴퓨터 안의 ‘배운용’ 이름 석자는 쉽게 지워지겠지만, 그를 알았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을 나쁜 사람 ‘배운용’ 이름 석자는 오래도록 살아 숨쉴 것이다. 사진 그대로의 모습으로….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사진>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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