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평의 아이&메모] 기발하고 감동을 주는 ‘플래카드 이야기’
OSEN 기자
발행 2007.08.14 10: 35

야구장에 가면 재미있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습니다. 프로야구가 4반세기를 지나다보니 팬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고 적극적인 응원시대로 접어들어 기발하고 감동을 주는 플래카드가 눈길을 끕니다.
더구나 근래 TV 중계에서 관중석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나 팬들이 만든 작은 패널을 보여주는 일이 감칠 맛을 돋구자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고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플래카드 전성시대가 됐습니다.
우리들의 눈길을 끌고 감동적인 플래카드가 있는가 하면 뒷맛이 개운치 않은 플래카드도 나돌고 있는 게 야구장 풍경이 됐습니다.
제 눈에 띈 몇 개를 추려 보겠습니다.
“민호야! 결혼하자”
-올해 롯데가 초반에 잘하고 그 주역의 한명으로 22살난 포수 강민호가 펄펄 날자 8월 초부터 케이블 TV에 강민호가 타석에 나서면 사직구장 관중석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이 결혼하자는 화끈한 내용의 패널을 들고 소리치며 요란한 몸짓을 하는 장면이 몇 차례 비쳐졌습니다. 처음에는 강민호의 연인인가도 생각했으나 강민호는 8월 9일 대구경기 직전에 SBS 스포츠 채널 담당자를 찾아가 제발 그 장면은 비추어주지 말아달라고 사정해 모르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어린이 근우야! 해치지 않을 게 나에게 와”
-올해 선두를 질주하고 있는 SK의 주역 정근우가 작은 몸매 때문에 ‘어린이’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어느 여대생이 패널을 들고 꾸준히 성원하고 있습니다.
“가을에도 야구하자”
– 2000년 준플레이오프에 오르고는 4년 연속 최하위를 차지하는 등 하위권에서 계속 헤매 포스트시즌에 6년 동안 진출하지 못한 롯데 팬들의 절실한 소망입니다.
“잠실구장 우리가 접수한다”
–올 시즌 초 롯데 성적이 상위권에 오르자 팬들은 서울 잠실구장 3루석에 대규모 응원단이 점령하고 잠실구장도 자신들의 구역(일본어로 나와바리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이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으면 팬도 포기하지 않는다”
“맨 위에 있든 맨 아래에 있든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남들은 꼴등이라 하지만 우리에겐 당신들이 영원히 1위입니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 힘들게 된 롯데지만 그래도 팀을 지켜보겠다는 팬들의 러브레터에 구단 직원들은 가슴이 찡하다고 합니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작은 탱크’ 박정태가 선수 시절부터 되뇌이던 한마디가 적힌 플래카드는 예외없이 사직구장에 그의 커다란 사진과 함께 붙박혀 있습니다.
아무리 응원해도 롯데의 성적이 시원찮으면 화도 날 것입니다.
“야구보러 탈영했다”
“좀 도와주십쇼~”
“롯데 와그라노? 제발 정신 차려라. 부산 사람들 어쩌라고?”
“이래가꼬 가을에 야구 하겄나?”
“가을에 야구 할끼가? 말끼가?”
-롯데 경기에 푹 빠진 군인 몇 명이 선수들에게 자신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치있게 응원하고 SBS TV의 ‘웃찾사’에 출연한 이동엽, 이광채, 박영재 등 개그맨들의 ‘서울 나들이’에서 나오는 유행어까지 동원해 롯데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6연패를 당하자 딱 부러지게 야단도 쳤는데 경기 후반에 이기게 되자 “와 그라노?”라는 플래카드는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연안부두에 우승의 배를 띄우자”
-‘연안부두 아저씨’로 알려진 SK팬이 원정경기까지 찾아가 보여준 대형 걸개입니다.
“일구이무. 기다림은 충분했다”
-김성근 SK 감독의 지론인 ‘공 하나에 집중하라”는 일구이무(一球二無-한번 공이 지나가면 두 번째 공은 없다) 표어를 내세우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갈망하는 팬의 소망입니다.
“양상문 파이팅”
-선수 아닌 감독을 성원하는 플래카드가 2005년 4월 사직구장에 모처럼 걸렸던 적이 있습니다. 2004년에 롯데 지휘봉을 잡은 양 감독의 모교인 부산고 동문들이 성원했는데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던 롯데는 2005년에 5위로 도약했습니다. 그러나 양 감독은 그 해 말 해임돼 구단에 대한 비판이 거셌습니다.
“잃어버린 트윈스 되찾기, 트윈스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2004년 11월 20일 잠실구장 앞에서 LG 팬들이 플래카드를 내걸고 ‘김용수 코치 복직과 구단의 파행 운영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모임을 가졌습니다.
“정도 경영 추구해온 LG 그룹, 야구단은 독재 경영”
-LG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분패해 준우승에 머물자 김성근 감독을 해임한데 대해 반발하는 팬들이 당시 어윤태 구단사장과 유성민 단장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버스에 달고 잠실구장과 트윈스 빌딩이 있는 여의도를 왕복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한화 독수리여 비상하여 불사조가 되라”
–지난 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한화의 점잖은 충청도팬들도 서서히 열성팬들로 변하고 있습니다.
“마이다스의 손 감독 김인식”
-2001 시즌 10승 투수 한 명 없이 두산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시켜 “믿음의 야구 김인식”이란 플래카드가 걸렸던 김인식 감독이 2005 시즌부터 한화를 맡은 후 정민철과 김인철 등을 재기시키고 팀 성적도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자 재활 용병술의 대가라고 한화 팬들은 플래카드를 내걸었습니다.
“조성민 선수 힘내세요”
-조성민이 2005년 5월 한화에 깜짝 입단한 다음 8월 잠실경기에 등판하자 일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부터 조성민을 좋아했다는 일본 아주머니팬이 관중석에서 내건 작은 플래카드입니다.
“꼴찌가 리오스 탓이냐 퇴출설이 웬말이냐”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 2005년 7월 기아에서 리오스와 김주호를 묶어 두산의 전병두와 트레이드시키자 어이없어한 기아팬들이 구단에 항의하고 리오스를 계속 사랑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석민이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일을 맞아 5승을 기원한다”
“고 김명성 감독님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거인입니다”
-2007년 7월 24일 광주구장 롯데-기아 경기 때 1루쪽 내야석과 외야석에 내걸린 플래카드입니다. 21번째 생일을 맞은 기아의 에이스 윤석민 생일을 축하하고 6년 전 급서한 김명성 롯데 감독의 기일을 기리는 플래카드여서 생일과 추모가 묘하게 대비 됐습니다.
“감독님 힘 내세요. 우리 함께 기적을 만들어 보아요”
-4강 후보에 들었던 기아가 올 시즌 줄곧 바닥을 헤매자 서정환 감독 퇴진론까지 나오고 있으나 시즌 끝까지 지켜보자는 애틋한 팬들의 성원도 있습니다.
“당신의 역투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합니다”
-8년 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해태(기아) 투수 김상진의 기일인 지난 6월 10일 광주구장에 걸린 플래카드입니다. 해태의 마지막 한국시리즈인 1997년 5차전에서 김상진은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습니다.
“박경수” “조인성”
-이들의 이름이 찍힌 유니폼을 입거나 걸어놓은 LG의 열성팬들이 8월 10일 광주구장에 나타났습니다. 예전 해태 시절 같으면 다른 팀의 응원은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이제는 야구장도 민주화(?)가 된 모양입니다. 힘이 난 박경수는 이틀 동안 스리런홈런 등 9타수 4안타을 때리며 보답했습니다.
“영원한 캡틴 서용빈” “믿음직한 큰 형님 김정민”
– 2006년 9월 24일 이들의 은퇴식이 열리자 잠실구장에는 팬클럽에서 외야석에 커다란 플래카드를 걸었습니다.
“고제트 고영민 파이팅”
-올해 전경기에 출장 중인 두산 2루수 고영민은 만화 주인공 가제트 형사처럼 긴 팔다리로 쭉쭉 뻗어 넓은 공간에서 수비하고 빠른 발로 상대팀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대표팀 후보까지 오른 요즘은 3번타자로 승격해 호타를 날려 인기짱입니다.
“GO! 챔프, V4를 향하여”
- 두산 김경문 감독은 점잖아서 그런지 자신의 별명이 붙은 글귀는 부담스러워 합니다. 2004년에 사령탑에 오른 김경문 감독은 2005년 8월에 외야석 중앙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베어스 팬들은 1982년 원년, 1995년, 2001년에 이어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바라는 플래카드를 설치했으나 김 감독은 ‘챔프’라는 용어가 영화 제목에서 따온 자신의 별명이기에 부담을 느낀 모양입니다. 그 해 두산은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두산 베어스 환영해요”
-인구 3만 명의 일본 오이타현 쓰쿠미시는 두산이 전지훈련을 가면 시청 공무원부터 주민들까지 공항에 나와 접대를 하고 시내 곳곳에 환영 플래카드를 내겁니다. 1991년부터 쓰쿠미를 전지훈련장으로 택한 두산은 현지 날씨가 썩 좋지 않아 훈련에 차질을 빚기도 해 다른 장소를 고려했으나 주민 전체의 따뜻한 환영에 어쩔수 없이(?) 찾아야 했고 4년간 다른 곳에 갔다가 2004년부터 다시 쓰쿠미를 찾고 있습니다. 두산은 전지훈련 동안 3억 원 가량을 현지에서 씁니다.
“청룡기는 강릉으로, 2014 동계 올림픽은 평창으로”
-올해 6월 6일 청룡기 고교야구 결승에서 팀 창단 32년만에 처음으로 전국대회 최종전에 오른 강릉고 3000명 재학생과 동문들의 염원이 담긴 플래카드입니다. 경남고에 0-5로 패했으나 강원도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순철아 우리는 네가 정말 창피하다”
-LG 트윈스의 사령탑인 이순철 감독이 2년 연속 6위에 머물고 2006년에는 시범경기서 1위를 차지했으나 정작 정규 시즌 들어 성적이 나쁘자 6월 4일 라이벌 두산과 경기 때 관중석에 어느 LG팬이 내건 플래카드입니다. 직원들이 쫓아 올라가 철거했으나 “감독이 성적이 나쁘다고 비난은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저런 상스런 용어를 공개적으로 내걸 수 있는 지 우리가 창피하다”고 구단 전체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두산에 3연패를 당하자 바로 이순철 감독은 2년 재계약 반년만에 해임됐습니다. 가장 혐오스런 플래카드로 꼽힙니다.
“편파적인 선수 기용 강 감독은 물러나고 롯데 팬들 등쳐 먹는 프런트는 물러가라”
-롯데가 올해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6월 이후 부진하자 원색적인 플래카드가 사직구장에 등장했습니다. 구단 직원들이 실랑이 끝에 철거시켰으나 낯뜨거운, 감정을 너무 앞세운 일부 팬들의 화풀이로 대부분의 팬들은 여길 것입니다.
“작지만 단단한 거인 경환 오빠 짱!”→“X지만 단단한~~~~”
-지금은 기아에서 뛰고 있는 조경환이 롯데(1998~2001년)에서 활약하던 시절 사직구장 외야석에 여고생들이 색종이를 오려 붙인 카드를 들고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경기 중반에 돌풍이 불자 플래카드 글자 중 ‘작지만’에서 ‘ㄱ’자가 떨어졌습니다. 여고생들은 문구가 달라진 것을 모르고 ‘X지만 단단한 거인 경환 오빠 짱!”을 요란하게 흔들며 성원해 이를 본 관중들은 배꼽을 잡았습니다. 앞줄에 있던 아저씨 한분이 ‘ㄱ’자를 다시 붙여줘 해프닝은 일단락 됐지만 롯데는 패했어도 모두가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부산에선 초등학교 여학생과 아주머니들의 파워도 대단합니다.
“삼순이 안보고 왔다. 이기도” “금순이도 안보고 왔다”
-2년 전 인기절정에 올랐던 MBC 드라마 가 방영하는 시간에 야구를 보러 왔으니 “이기도(‘이겨 주세요’의 경상도 사투리)”를 요구하는 모녀의 패널 또한 감동과 웃음을 자아냅니다.
천일평 OSEN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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