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표의 발 없는 말]‘시구자를 찾습니다!’
OSEN 기자
발행 2007.08.24 10: 33

‘시구자를 찾습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색다른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올해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 선정을 놓고 은근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입니다.
10월 중순께부터 시작될 대회 시기를 감안한다면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시구자 선정을 놓고 KBO가 장고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땅한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페넌트레이스와 달리 포스트시즌은 KBO가 운영 주체로 나섭니다. 시즌 중에야 각 구단이 알아서 때에 맞춰가면서 적당한 시구자를 골라 이벤트를 할 수 있지만 한국시리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해 프로야구 농사를 총결산하는 자리인데다 특히 1차전 시구자는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봐야합니다.
KBO 이상일 운영본부장은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은 백지상태고 현재는 답이 없습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아직 뾰족한 묘책을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시리즈 시구자, 특히 1차전 시구자를 놓고 여러 갈래, 다방면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상징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상일 본부장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정치인은 고려 대상에서 무조건 배제한다. 야구와 친근한 사람,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물 좋고 경치 좋은 정자가 있는 곳같은 그런…”이라고 여운을 남기면서 막상 고르려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입에 딱 들어맞는 인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을 얘기했습니다.
아무래도 화제의 인물이나 미담의 주인공을 우선 꼽을 수 있겠지만, 선뜻 떠오르는 인사가 없는 모양입니다. 야구와 연관된 인물로는 2007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여자소프트볼에서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꺾는 데 주역으로 활약한 투수 박수연 등도 후보 선상에 올려놓고 있긴합니다.
프로야구 26년 동안 대통령에서부터 관료, 유명 체육인,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숱한 인물들이 시구자로 나섰습니다. 최근에는 몸매가 늘씬한 인기 여성 연예인들이 각 구단 이벤트성 행사에 단골 시구자로 화제를 불러모으기도 했지요. 그 가운데 여성 댄스그룹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멤버인 스테파니는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왼발을 쭉 뻗어 하늘로 차올린 ‘거침없는 시구’(맨 아래 사진)로 인해 그녀는 누리꾼들로부터 폭발적인 성원과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오죽했으면 메이저리그의‘강속구의 전설’ 놀란 라이언의 투구 모습을 빼닮았다고 해서 ‘ 놀란 스테파니’라는 애칭이 붙었을까요.
시구가 단순히 행사의 첫 머리에 으레적으로 치장하는 양념 정도가 아니라 빼놓을 수 없는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로 격상된 사례입니다.
역대 한국시리즈 시구자를 보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유흥수 당시 충남도지사가 나선 것을 비롯 대개는 그 지역 행정관료(시장, 도지사 또는 장관 등)가 등장했습니다. 그네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빈도가 잦았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 95년 이태 연속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그라운드에 나섰습니다.
연예인은 1990년 1차전에 이승은 미스코리아 태평양이 첫 선을 보였고 그 이후 1998년 탤런트 채시라, 2004년 박정아, 2005년 한혜진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관료에게 시구를 의존하는 행태가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시리즈의 특성상 지방에서 대회가 열릴 경우 홈구단이 그 지역 시장 등에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달리 미국 메이저리그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홈구단이 우선 선정권을 가지고 있어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그리 신경을 안써도 됩니다. 9.11 테러가 터진 2001년의 경우 뉴욕시 소방대원이 시구자로 발탁돼 시구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메이저리그는 구태여 이런 저런 제약을 받지 않고 밑의 뜻이 위로 올라가 자연스럽게 시구자를 정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한국프로야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려해야 될 점이 적지 않고 지역의 특성과 전국적인 지명도, 아니면 고도의 상징성 등을 띠어야하는 까닭에 어찌보면 가장 손쉬운 관료를 택하는지도 모릅니다.
이승만, 전두환, 김영삼 등 옛 대통령과 노무현 현 대통령 등도 시구를 한 적이 있지만 노태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시구를 정치적인 성향과 연결시켜 보기도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의 명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구단이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일보사의 초청으로 방한, 1958년 10월21일 서울운동장에서 한국대표팀인 전서울군과 친선경기를 가졌을 때 시구자로 나섰습니다. ‘나섰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스탠드에서 시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사진 맨 위). 왜 이승만 대통령이 그라운드가 아닌 스탠드에서 백스톱의 철망 일부를 네모로 오려내고 시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 자유당 정권이 온갖 부정부패로 정권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경호 차원에서 괴이쩍은 시구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닌가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정권 붕괴 2년 전이라는 시점에서 그가 보여준 이같은 모습은 비록 야구경기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한 편의 ‘희화(戱畵)’같은 역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도포를 입고 시구한 친일파 윤치호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됐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석방됐던 윤치호는 1915년 3월14일치 에 실린 인터뷰에서 “우리 조선민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 이라고 공개 선언하는 등 그 때부터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시작했습니다.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2003년 기독교 서지연구가 신인수 씨가 1931년 LA 종우서관이 펴낸 노래집 에 ‘윤치호 작사 애국가’가 수록돼 있는 사실을 밝혀낸 적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변절했던 그는 선친 윤웅렬의 뒤를 이어 일제로부터 남작의 지위를 물려받았고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적극 동조, 부역하는 등 이토 지카우(伊東致昊)로 창씨개명해서 살다가 갔습니다.
그야 어쨌든 윤치호는 1928년 5월18일에 열린 제 9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시구자로 나섰습니다. 옛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시구를 하는 장면이 한국야구위원회가 발간한 에 실려 있습니다.(사진 위에서 두 번째)
한국프로야구가 원년 개막전(1982년 3월27일)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씨에게 시구를 부탁했듯이 일제 치하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렸던 윤치호가 시구자로 나선 점 또한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정치적인 인물, 또는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인사는 무조건 배제한다는 게 KBO의 확고부동한 방침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물이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나서는 것이 가장 보기 좋고 알맞을까요. 감동을 줄 수 있는 시구자, 어디 없을까요. 여러 분의 견해는?
홍윤표 OSEN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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