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평의 야구장 사람들]김시진 감독의 눈물, 현대 대주주들 너무 아쉽습니다
OSEN 기자
발행 2007.10.08 13: 04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고 싶습니다”. 현대 유니콘스가 2007 시즌 최종 경기를 펼친 10월 5일 수원구장에서 한화를 2-0으로 이긴 다음 유니콘스의 김시진(49) 감독은 기자들이 마지막 경기를 마친 소감을 묻자 “마지막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얘기인데 팀은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올 시즌 마지막 경기로 생각하고 싶습니다”며 입술을 물었습니다. 방송 인터뷰에서도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다 고개를 숙인 김시진 감독은 팬들이 그라운드에 내려와 다가오자 눈시울이 붉어졌고 감독실에 들어가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제가 김시진 감독과 처음으로 만난 것은 31년 전 김 감독이 대구상고에 재학할 때입니다.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하는 전국 팀을 탐방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당시 정동진 감독(전 삼성 감독)은 훌쩍 키가 크고 말없이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김시진과 배터리를 이룬 이만수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요. 투수 김시진을 같은 또래의 최동원(경남고), 김용남(군산상고)과 더불어 최고의 투수로 손꼽으면서 성격이 좋고 인내심이 대단하다며 몇 년 후에는 대표팀 투수로 뽑힐 인재라고 치켜 세웠습니다. 그 해 열린 제10회 대통령배대회 결승에서 김시진은 역투하다가 마지막 순간 김종윤에게 결승 적시타를 맞고 김용남이 던진 군상상고에 0-1로 패했습니다. 김시진은 이만수와 같이 한양대에 진학했고 곧바로 대표팀에 선발돼 1977년 중미 니카라과에서 거행된 슈퍼월드컵대회에 출전해 한국야구가 최초로 세계 정상에 올랐습니다. 김응룡 감독이 이끈 대표팀은 마운드에서 좌완 이선희가 최고의 피칭을 하고 김재박이 타격 3관왕을 휩쓸면서 우승했는데 김시진은 미국과의 최종 우승 결정전에서 선발 등판해 5-4로 승리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낮게 깔리는 강속구와 코너웍이 좋았고 슬라이더가 일품이었습니다. 육군(경리단)을 거쳐 1983년에 삼성에 입단한 김시진은 프로 최초로 개인 통산 100승 고지에 선착했습니다. 1988년 시즌 후 롯데의 최동원과 맞트레이드가 돼 1992시즌까지 선수 생활을 더 했습니다. 10년간 개인 통산 124승 73패 16세이브, 평균자책점 3.12를 기록한데 비해 한국시리즈에서는 무승 7패로 지독하게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1993년 현대의 전신인 태평양 돌핀스에서 코치직을 시작해 2006년 시즌까지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직을 역임하다, 김재박 감독이 LG로 떠난 2006년 시즌 종료 후 유니콘스의 2대 감독이 됐습니다. 대구 출신이지만 김시진 감독은 지도자로는 인천-수원에서 15년간 한 우물을 판 골수 야구인이 된 것입니다. 김 감독은 “한번도 다른 유니폼을 입어본 적이 없어 실감이 나지 않네요. 하지만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년에 다시 그라운드에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사라질 현대의 녹색 유니폼 로고 모자에 애착을 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야구위원회(KBO)와 신흥 중견 그룹인 STX의 인수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나 내년에도 올해처럼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STX의 인수 작업은 지난 달 27일 신상우 KBO 총재가 기자 간담회에서 현대를 인수할 기업이 있어 11월에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힌데 이어 다음 날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 ‘열린 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 가진 전화인터뷰에서 “어제 기자간담회에서는 넉넉하게 여유를 잡았지만 10월초까지는 아마 좋은 소식이 전해지리라 생각한다”고 말하고 해당 기업의 윤곽을 밝혀 STX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신 총재는 인수할 기업에 대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며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뻗어가는 기업이다. 흔히 말하는 기준으로 따지면 대재벌과 튼튼한 중소기업 그 중간쯤으로 보면 된다”고 암시해 기자들이 곧바로 STX를 점찍고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실제는 이미 지난 2월부터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STX 인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STX가 구체적으로 알려지자 STX측은 난감해 했고 KBO는 “기자들이 너무 빨리 보도해 탈이 났다”며 지난 2월에 벌어진 농협의 유니콘스 인수 발표가 무산된 것처럼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며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하일성 KBO 사무총장은 지난 5일 수원 최종전에 나와 “미리 보도가 돼 추진 작업진행상 차질이 생겼으나 다른 각도에서 STX와 각종 조건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혀 STX의 유니콘스 인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척되고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STX의 인수가 원만하게 처리되길 바라면서도 야구 현장에서 30여년간 지낸 필자로서는 못내 현대의 중도하차가 아쉽습니다. 현대는 고 정주영 회장이 야구에 참여하려고 실업야구 시절이던 1977년 가을에 당시 최강이던 한일은행과 제일은행팀을 합쳐서 인수하려다 제일은행측 노조의 반대로 무산 됐습니다. 현대 그룹이 야구와 두 번째 인연을 맺은 것은 프로야구 출범 때인 1981년 가을이었습니다. 현대도 당연히 인천을 연고지로 한 기업체로 선정됐으나 정주영 회장이 그 무렵 서울 올림픽 유치를 위해 바쁜 때여서 야구단 창단을 고려하려다 무산됐습니다. 프로야구가 1982년에 발족해 1990년대 들어 최고의 인기를 얻자 현대는 세 번째로 야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프로야구 가담을 위해 먼저 대한야구협회 행정을 맡기로 하고 이현태 현대석유화학 회장이 1994년 3월에 대한야구협회 회장에 취임한 다음 11월에 현대 피닉스 실업야구팀을 창단했습니다. 문동환, 안희봉, 문희성 등 거물 신인과 우수선수들이 대거 입단했고 임선동은 7억 원의 계약금을 받아 프로팀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등 돌풍을 일으켰죠. 그리고 현대는 비밀리에 쌍방울 레이더스 인수를 검토하다가 1995년 8월에 인천의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현대 유니콘스로 탄생했습니다. 당시 야구계에서는 인수 대금으로 200억 원 정도를 계상했는데 파격적인 470억 원(현금 400억 원, 부채인수 70억 원)이어서 ‘통큰 베팅’이란 말과 함께 ‘무지한 베팅’이란 말도 함께 나돌았습니다. 프로야구에 뛰어든 현대는 1996년 창단 첫 해 준우승에 이어 3년째인 1998년에는 한국시리즈 패권을 차지하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으나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와 그룹의 경영 부실, 정주영 회장 아들간의 갈등으로 인한 ‘왕자의 난’과 2003년에는 야구단을 총괄했던 정몽헌 그룹 회장의 투신 자살 등이 잇따라 일어나자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로 인해 2003년 인천 연고를 신생팀 SK에 54억 원에 넘겨 구단 운영비로 사용하고 연고지를 서울로 바꿨으나 LG와 두산에 주어야 할 27억 원을 이행 못해 신인 1차 드래프트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고 그동안 힘든 운영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2006 시즌을 마치고 끝내 더 이상 구단을 운영하기 힘들다는 의사를 KBO에 표명했습니다. 이에 KBO는 지난 해 말 현대가 야구단을 계속 끌고 가는 게 좋다고 판단해 현대 계열사들을 설득해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회장 사무실에서 현대 기아차(정몽구 회장)와 현대 그룹(현정은 회장) 관계자가 만나 계속 구단을 운영키로 약속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2007년도 지원 금액은 현대 기아차에서 90억 원, 해상화재에서 40억 원, 현대 그룹에서 30억 원 등 총 160억 원을 출연하기로 했는데 현대 그룹 관계자가 갑자기 불참을 하고 빠지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아마도 현대전자가 1999년에 LG반도체(주)를 인수하고 현대반도체(주)를 합병하여 정몽헌 회장이 잘 이끌어 갔으나 외환위기를 겪으며 2001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회사명을 (주)하이닉스반도체로 변경, 8월 현대그룹에서 분리되는 진통을 겪은데 대한 현정은(정몽헌 회장 부인) 회장의 서운함이 원인인듯 합니다. 현대그룹이 마지막에 돌아서며 사정이 바뀌자 현대기아차도 노조 파업 등으로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고 골치를 앓고 있던 차여서 야구단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입니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가 지난 3월 27일에 쓴 칼럼 ‘현대 야구단 해체 경위 비사’에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은 어차피 팔려나갈 운명이었습니다. 최근에 전해들은 얘기로 미루어본다면, 현대는 그 시점이 문제였지 더 이상 구단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현대 구단이 파탄의 조짐을 보이고 바깥으로 매각설이 흘러나온 것은 2년 전쯤인 2005년 봄이었습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 박용오 총재를 만나 구단 매각을 요청한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2005년 5월 어느날, KBO 이상일 사무차장(현 운영본부장)에게 현정은 회장측에 연락을 취해 회동 날짜를 잡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현대 구단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박 총재가 현 회장을 직접 만나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심산에서였습니다. 만남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일식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현 회장은 그 자리에서 박 총재에게 구단 매각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이상일 운영본부장은 “ 너무 긴장되고 어려운 자리여서 세상에 태어난 후 가장 맛없는 식사를 했다 ”고 돌이켜보기도 했습니다. 현대 구단이 심각한 운영난에 처한 것이 바로 그 무렵부터였습니다. 현대 구단은 매년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80억 원, 현정은 현대 회장과 야구사랑이 유별난 정몽윤 현대화재해상보험 회장이 각 40억 원씩 갹출, 구단운영비를 지원해왔습니다. 그러나 현정은 회장이 경영권 분규를 겪으면서 2005년부터 지원을 중단해 현대 구단은 2006년까지 정몽구, 정몽윤 회장의 지원금만으로 꾸려갔으나 한계에 부닥쳐 현저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렵사리 굴러갔던 현대 구단은 2007년부터 지원 젖줄이었던 현대기아차의 공급이 끊기게 되자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급기야 매각의 도마 위에 오르는 운명을 맞은 것입니다. 정몽윤 회장은 작년 12월 KBO 하일성 사무총장을 만나 구단 매각을 다시 한 번 의뢰했습니다. 그 때부터 KBO 하일성 총장의 고뇌도 깊어졌습니다. 선뜻 원매자가 나서지 않고 있던 차에 농협이 신상우 KBO 총재를 통해 매입 의사를 불쑥 밝혔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경위를 보면 현대그룹의 포용력이 아쉽습니다. 정 씨 일가의 갈등에 서운함이 있었겠지만 고 정몽헌 회장이 사랑한 유니콘스를 끝까지 돌보지 않은 것은 안타깝습니다. 또 현대기아차도 정몽구 회장이 지난 해부터 8400억 원의 사회공헌기금을 포함해 1조 원 상당의 사재출연을 한다고 했는데 11년간 운영한 프로야구단의 해체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처사입니다. 현대가 프로야구단 운영에 다시 나서는 일은 없을까요? 천일평 OSEN 편집인 김시진 감독이 최종전을 마치고 선사한 사인과 배번 79번이 적힌 유니콘스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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