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수레바퀴’를 되돌린 사나이.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최우수선수(MVP)로 탄생, 진가를 재조명 받은 김재현(32. SK 와이번스)이 그렇다.
배트 스피드에 관한한 한국의 타자들 중에서 아무도 그를 따를 자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온 김재현이었다. 그의 시원스런 방망이가 11월 8일 밤 도쿄에서 열린 제 3회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또 폭발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주역 김광현(19)의 역투 속에 2안타(2루타 2개), 1타점, 3득점으로 팀 승리를 앞장서 이끈 것이다.
선수생활의 연장이냐, 아니면 포기냐의 기로에 섰다가 하루아침에 눈 씻고 다시봐야할 처지로 돌변한 김재현. 만약, 김재현이 LG 트윈스에 그대로 눌러앉았더라면, 아마도 한국야구사의 지형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누구나 삶의 전기는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운동선수들의 경우 특정 지도자나 팀과의 연분이 잘 들어맞을 때 진면목을 발휘할 수 있다. 아무리 재주가 있더라도 성장과 도약의 발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 바로 우승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고 있는 SK 구단 프런트의 안목과 노고이다. 이를테면, 선수 스카우트 같은 일은 구단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떤 선수를 어떻게 영입하느냐’하는 문제는 경우에 따라서는 구단의 사활을 걸어야하는 엄청난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올해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탄생, 그 진가를 재조명 받은 김재현(32. SK 와이번스)의 사례가 그렇다. 만약, 김재현이 LG 트윈스에 그대로 눌러앉았더라면, 아마도 한국야구사의 지형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두 차례의 스카우트 소동
김재현은 두 차례의 스카우트 파동을 겪었다. 1994년 LG에 입단할 때와 2004년 자유계약선수(FA) 신분으로 SK로 이적할 때이다. 엄밀하게 FA 이적은 파동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LG 간판타자의 이적은 당시로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김재현은 ‘캐넌히터(cannon hitter)’라는 강한 애칭으로 1994년 데뷔 첫 해부터 많은 팬의 사랑을 받아왔다. 깔끔한 외모로 박노준이 고교시절(선린상고) 그랬던 것처럼 신일고 때부터 팬들이 많이 따랐다. 당시만하더라도 고교 유망주들은 대학을 선택하는 것이 주류였다. 김재현 역시 연세대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LG가 그를 나꾸어챘다. 1993년 11월, 김재현은 청소년대표로 일본 오키나와에서 순회경기를 하고 있었다. 김재현을 잡기 위해 LG가 유지홍 스카우트를 오키나와로 급파했다. 당사자와 부모의 마음을 돌리고 11월 11일 계약 합의서에 도장을 받은 LG는 13일 언론사에 계약사실을 공표하고 15일 김포공항에서 김재현을 납치하다시피 빼돌렸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연세대의 방해공작을 저어해서였다.
김재현은 연세대에 가등록된 상태였다. 당시 김충남 연세대 감독은 김재현을 놓치자 이호준(광주일고 3년)을 서울 올림픽파크텔에 감금해 놓고 엄중감시하고 있었으나 그마저 해태 타이거즈 김경훈 스카우트가 탈출시키는 바람에 결국 둘다 놓치고 말았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재현은 첫 해 신인 처음으로 20(홈런)-20(도루)을 달성했다. 그 때 김재현에게 20호째 홈런을 허용한 것이 바로 이호준이었다. 1994년 9월 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해태전에서 김재현은 8회 말 솔로홈런을 터뜨려 신인 최초로 20-20 기록을 세웠다. 8월 9일 잠실 롯데전에서 20호 도루를 성공시켜 ‘힘과 빠르기’의 상징인 20-20 클럽에 한 쪽 발을 디밀었던 김재현은 8월 20일 잠실 한화전에서 19호홈런을 만루홈런으로 장식한 다음 보름남짓 홈런 한 방을 보태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연세대 스카우트 파동의 동반자였던 이호준으로부터 대기록을 빼낸 셈이 된 것이다.
이호준은 지난 10월 27일 한국시리즈 5차전 승리 후 김재현과 나란히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 때 (김재현의 20호) 홈런을 얻어맞고 2군으로 내려갔고 결국 타자로 바꾸었다”며 웃으면서 지난 일을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서 김재현은 “그래서 네가 있는거야. 안그랬으면 짤렸어”라며 즐거운 대꾸를 늘어놓아 회견장을 한바탕 웃음바다로 만들었기도 했다.
대학 스카우트 파동에 이은 이같은 둘의 이상한 인연은 SK로 이어져 결정적인 대목에서 3번(김재현)과 4번(이호준) 타자로 힘을 합쳐 팀 우승을 일궈냈다.
김재현의 선수생활은 신일고 12년 선배인 민경삼(44) SK 운영본부장과의 만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2004년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김재현은 11월 20일까지 원래 소속구단이었던 LG와의 협상이 결렬됐다. 그 이튿날 새벽, 김재현은 민경삼 본부장과 만나 전격적으로 SK행에 합의, 사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LG가 부상 전력(고관절 이상) 등을 들어 협상에 미온적이었던데 반해 민 본부장이 적극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해 그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민 본부장은 LG 트윈스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뒤 구단 프론트에서 활동, 구단 관리자로 경험을 쌓은 뒤 신생 SK로 옮겨 김성근 감독, 이만수 수석코치 영입과 이호준, 김재현 등 자원확보에 수완을 발휘해온 야구계의 숨은 인물이다. 김재현의 스카우트도 따지고 보면 민 본부장이 공을 들인 결과이다.
당시 김재현은 총액 20억 7000만 원, 계약기간 4년에 계약금 8억 원, 2005, 2006년 2억 3000만 원, 2007년 2억 5000만 원, 2008년 3억 원으로 단계적으로 인상된 연봉을 받기로 했다. 계약조건이 큰 테두리에서는 LG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LG 측이 내건 ‘계약금 분할 지급’과 ‘2년 후 계약내용 변경 가능’의 두 가지 단서가 결별의 원인이 됐다.
김재현은 한국시리즈 도중 올해 김성근 감독의 플래툰시스팀으로 인해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마음고생을 한 데 대해 “더 못뛰어도 팀 성적이 워낙 좋았고 만약 내가 튀는 행동을 했다면 팀 분위기가 흐트러졌을 것이다. 상당히 자제한 것은 사실이다”고 토로한 바 있다. FA 선수로서 제 성적을 내지못한다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야하는 그로선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고충이었을 것이다.
선수생활의 내리막길에서 ‘회춘타(回春打)’를 날린 김재현. 후배들에게 던졌던, ‘순간을 즐기면서 야구를 해라’는 조언은 그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Tip=될성부른 선수는 스카우트 파동으로 알아본다?…이승엽 사례
국민타자 이승엽도 고교 졸업무렵 스카우트 파동의 주역이었다.
1994년 11월 어느 날,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책임자였던 이문한 과장은 경북고 졸업반인 이승엽이 고교 1년 선배인 김수관(당시 한양대 1년)과 함께 대구 시내 당구장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과장은 김수관이 모르는 삼성 구단 직원을 보내 이승엽과 접촉, 동산호텔로 불러냈다. 한양대에 입학할 예정이었던 이승엽은 이 과장과 만나 ‘한양대에 안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승엽은 그 다음날 수능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삼성 구단은 낙담했다. 정작 이승엽은 일부러 수능을 엉망으로 치렀다. 이미 그의 속마음은 프로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부친 이춘광 씨가 대학 진학을 워낙 강하게 원했기 때문에 이승엽은 내색을 하지 않고 수능성적 발표날까지 기다렸다. 그 즈음 삼성 구단에 이승엽이 수능을 완전히 망쳤다는 소식이 흘러들었다.
발표 당일 이승엽의 수능 낙방을 확인한 이문한 과장은 당시 삼성 김상두 홍보부장과 함께 상경, 한양대 이종락 체육부장을 찾아가 양해를 구했다. 이승엽은 수능 점수 발표 전날까지도 한양대 선수들과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 과장과 김 부장, 이승엽과 부친, 이종락 한양대 체육부장이 서울 삼정호텔 커피숍에서 회동했다. 그 자리에서 이승엽의 삼성행이 결판났다. 이승엽의 부친은 아들이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고 프로로 가게 되자 상심한 나머지 눈물까지 내비쳤다.
삼성 구단 이광진 대표이사는 이문한 과장에게 고졸 최고대우로 이승엽을 스카우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승엽의 계약조건은 계약금 1억 2500만원, 연봉 2000만 원이었다. 이승엽이 끝내 대학을 고집했더라면 야구 세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