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계의 명지도자였던 가와카미 데쓰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 감독은 “‘승부’라는 두 글자에는 문자 그대로 ‘승리’와 ‘패배’밖에 없다”고 갈파했다. 가와카미는 요미우리의 저팬시리즈 9연패(1965~1973년) 신화를 일궈낸 명장이었다.
승부세계의 본질을 적시한 말이다. 그 이상 설명이 필요 없겠다. 이기고 지는 것, 그 일상 속에서 승부사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 프로세계에서 성적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지도자가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퇴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기축년(소해) 새해가 밝았다. 2009년 한국 프로야구 감독들은 지도자 생명을 건 벼랑 끝 승부를 앞두고 있다.
한화 이글스 김인식(62) 감독을 비롯 LG 트윈스 김재박(55) 감독, KIA 타이거즈 조범현(49) 감독, 삼성 라이온즈 선동렬(46) 감독 등 국내파와 롯데 자이언츠의 제리 로이스터(57) 감독까지 8개구단 가운데 무려 5개구단 사령탑이 계약 만기의 해를 맞았다. 자연히 이들 지도자의 팀 성적과 행보가 큰 눈길을 끈다.
경우에 따라서는 2009시즌을 마치고 나면 프로야구계가 한바탕 지도자 대이동이나 물갈이의 소용돌이에 빠질 공산이 크다.
거론된 5개 구단 감독들 외에 2년 연속 한국시리즈를 제패하고 사상 최다액(총액 20억 원)으로 3년 재계약에 성공한 SK 와이번스의 김성근(67) 감독과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과 2008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의 혁혁한 전과를 올려 3년 재계약을 따낸 두산 베어스의 김경문(51. 총액 14억 원) 감독, 신생 히어로즈 새 감독으로 현역에 복귀했던 김시진(51. 총액 8억 원) 감독은 일단 폭풍우에서 비켜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계약 종료 해의 감독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성적이 부진하면 소속 구단이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는 점에서 5개구단 감독은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롯데의 경우 로이스터가 외국인으로서는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2008년에 지휘봉을 잡은 다음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며 팀을 8년만에 가을잔치에 참여시켰다는 점에서 후한 평점을 받고는 있다. 그러나 그마저 올해 성적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면 앞날을 장담하기 어렵다.
김인식, 김재박, 선동렬 등 세 감독은 남못지 않은 우승 훈장을 달고 있는 관록파이다. 김인식 감독은 1995년과 2001년 두 차례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1995년은 OB, 2001년은 두산의 이름으로) 올해야말로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켜야할 판에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감독까지 떠안아 2중의 부담을 지고 있다. 2006년 1회 WBC 때 한국대표팀을 일약 4강에 올려놓아 ‘국민감독’ 칭호를 얻었던 김인식 감독은 이번 대회 성적이 올해 프로야구 흥행에 직결된다는 주위의 시선으로 인해 엄청남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소속팀 한화도 올해는 4강 이상으로 이끌어야하는 막중한 책무가 있다. 스토브리그서 뚜렷한 전력보강이 없는 한화는 류현진(22)과 유원상(23) 등 젊은 투수들이 기둥으로 버티고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노쇠한 마운드(송진우 43, 구대성 40, 정민철 37살)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 눈여겨 볼 일이다.
2008시즌 최하위로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던 김재박 감독은 LG 구단이 이진영과 정성훈, 두 FA 타자를 잡아주는 바람에 지난 시즌 내내 노래했던 ‘우수선수 영입’을 더 이상 부를 수 없게 됐다. 구단측이 적극적으로 전력 보강을 해준만큼 부담감 또한 뒤따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현대 유니콘스 시절 한국시리즈 4차례 우승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솜씨를 어떻게 발휘할지 주목된다. 만약 성적이 기대치에 미흡하다면, LG 구단이 더 이상 인내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선동렬 감독의 경우 2008시즌 후에 불거진 일부 소속 선수들의 인터넷 도박 연루 사건 등으로 인해 관리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지도자로서 흠결을 입은 셈이 됐다.
2005년에 스승인 김응룡 감독(현 삼성 구단 사장)으로부터 팀을 물려받아 이태 연속 한국시리즈 제패의 빛나는 업적을 세웠던 그는 5년 계약기간 중 4년 연속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 시켜 외형적인 성적만을 놓고 본다면 삼성 구단이 내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러나 구단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선수들의 도박 사건과 시즌 성적표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 초미의 관심사이다.
삼성 구단은 당초 올시즌 성적에 상관 없이 선동렬 감독과 재계약을 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워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미지수로 전해지고 있다.
로이스터 감독은 만년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롯데 선수들에게 ‘기’를 제대로 불어넣어 2008시즌에 페넌트레이스 3위의 전과를 올리긴 했다. 그러나 막상 염원의 포스트시즌에서는 삼성에 3연패로 허망하게 무릎꿇고 말았다. 이같은 모습을 올해도 재현한다면, 롯데 구단측도 다른 결심을 할 공산이 크다.
이 시대 탁월한 야구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앞 길에 가로놓여 있는 운명의 짐을 부사리처럼 어떻게 치받을 지 지켜보자. 그들이 그려낼 변주와 곡예가 기다려 진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
공교롭게도 제1회 WBC에 코칭스태프를 참여했던 김인식 감독, 김재박 감독, 조범현 감독, 선동렬 감독 등이 올 시즌 종료 후 재계약이 걸려 있다. 사진은 김인식 감독과 김재박 감독.
제1회 WBC 대회 때 함께 했던 김인식-김재박-조범현
사제지간인 김인식 감독과 선동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