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경기에는 법으로 통제된 정식규칙이나 규정은 아니지만, 도덕성과 관련해 선수가 플레이를 하면서 가급적 지켜야 하는 일명 ‘야구 에티켓’이라는 불문율이 언제부터인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다른 표현으로 ‘야구경기의 예의범절’ 쯤으로 축약되는 이 불문율의 내용에 관한 것은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기 때문에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다만 시대적으로 이제는 널리 알려졌다고 생각되는 에티켓 시비가 단초가 되어 빈볼 등의 잡음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이 아직도 일어나곤 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한번쯤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지난 5월 26일 LG와 KIA전(잠실구장)에서는 좌완 박경태(KIA)가 2-17로 크게 뒤지고 있던 5회말, LG의 이대형에게 빈볼성 위협구를 던졌다는 이유로 퇴장을 선언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정확한 물증은 없지만 아마도 이대형이 경기 초반 비교적 큰 점수차의 리드 상태에서 연거푸 도루를 시도한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빈볼성 위협구를 부른 것으로 보여진다.
이대형이 이날 도루를 시도한 것은 모두 두 차례. 첫 번째는 팀이 7-1로 앞서고 있던 1회 말 (2사 1, 3루 상황)이었고, 두 번째는 LG가 8-1로 한 점 더 달아난 3회 말 (1사 1,3루 상황)이었다.

야구 에티켓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하나 들어있다. 그것도 가장 앞줄에 나와 있다.
‘큰 점수차로 리드하고 있을 때에는 도루나 번트를 행하지 말 것.’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울러 승패가 완전히 기운 상황에서 패자의 마음을 헤아려줄 줄 아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그 속에 담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큰 점수차라는 것은 몇 점 이상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를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숫자를 기준으로 상황을 재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에 따라서는 2, 3점 차도 비중 있는 점수차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7, 8점 차면서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그 결론은 경기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경기의 흐름을 읽는데 있어 참고가 되는 내용들은 뭘까? 우선은 경기가 초반이냐 중반이냐, 아니면 종반이냐가 가장 큰 가름 요인이 된다.
경기가 중반을 넘어섰을 경우에는 각 팀의 잔여 투수력이 그 다음 고려대상이 된다. 각 팀의 후반부 마무리 투수들의 투수력에 따라 지금의 점수차가 극복되기 힘든 점수차인지 아니면 따라 잡을 수 있는 가시권 점수차인지를 판단한다.
또한 주전선수들의 교체여부도 살핀다. 경기를 사실상 포기하는 팀에서는 주전들을 일찍 경기에서 빼내 체력이라도 비축하려는 의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승패에 대한 미련을 이미 접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제 이대형의 도루를 경기흐름의 물살 속으로 던져서 녹여보도록 하자. 도루를 시도했던 상황인 ‘7-1’이나 ‘8-1’ 모두 점수차는 비교적 큰 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대형이 도루를 시도한 1회와 3회는 경기 초반이다. 향후 경기상황이 어떻게 돌변할지 기회의 가능성이 상대에게 많이 남아있는 시점이었다.
투수력을 놓고 보면 봉중근(LG)과 윤석민(KIA)이라는 A급 선발의 대결구도였다. 이날 투수들의 지명도로 볼 때 6, 7점 차는 초반이긴 하지만 당일의 구위에 따라 극복하기 힘든 점수차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섣부른 예단이 곤란한 경기초반이었다는 점은 투수의 구위가 누르기 힘든 조건이다.
참고로 현재 한국프로야구의 무관심도루(진루) 적용기준과 사례 역시 초반이나 중반보다는 경기 종반에 집중되어 있다. 대개는 지고 있는 팀에서 뛰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설령 이기고 있는 팀에서 뛰었다 하더라도 이대형의 예처럼 그 시점이 경기 초반이라면 무관심도루를 적용하기 곤란하다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매너와 빈볼의 경계선에서 만난 이대형과 박경태는 궁합(?)이 맞지 않는 만남이었다. 이대형에게 매너 없는, 자기 기록만을 챙기기 위해 뛰었다는 혐의를 덮어씌우기엔 경기상황이 너무 일렀다. 상대 처지에서는 얄미울 수는 있겠지만 야구적으로 죄(?)가 될 수는 없는 정황이었다.
따라서 박경태의 빈볼은 이대형 개인에 대한 응징이라기 보다는 대패기조로 몰려가는 경기에 대한 스스로의 실망감과 분함이 뒤섞인 감정표출로 해석하는 것이 어쩌면 더 타당한 해석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2000년 5월, 박경완(당시 현대 소속)은 한화와의 대전경기에서 4연타석 홈런의 대기록을 수립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8회초 다섯 번째 타석, 하지만 팬들의 큰 기대와 관심을 뒤로 하고 박경완은 대타로 교체되어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다. 한, 미, 일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5연타석 홈런’(1988년 한국화장품 강기웅이 청주구장에서 단 한번 기록)이라는 대기록에 도전조차 해보지 못하고 기회를 날린 셈이었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상대의 빈볼 위험 때문이었다. 당시 박경완이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었다면 과연 빈볼이 날아들었을까?
빈볼은 매너 없는 상대의 플레이에 대한 응징과 보복의 성격으로 행해지는 아주 위험천만한 행위이지만, 반대로 대기록이나 진기록을 앞둔 상대 선수에게 기록을 내주기 싫어서 빈볼성 위협구를 던지는 행위는 더더욱 비난 받아 마땅한 매너를 상실한 비신사적인 행위가 아닐런지… .
빈볼이 매너 없는 플레이의 경계선을 가운데 두고 그 앞 뒤를 넘나들고 있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사진>이대형과 박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