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37)가 전격적으로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행을 발표한 지난 20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상일 사무총장은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대한야구협회(KBA) 강승규 회장의 출판기념회에 참석 중이었다. 행사 시작을 기다리며 이상일 총장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박찬호가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기사를 보고 놀라면서 ‘우리 한국프로야구로 돌아왔으면 좋았을텐데 정말 아쉽다’라는 뜻을 밝혔다.
저물어 가는 2010년 소속팀이었던 피츠버그에서 메이저리그 동양인 출신 최다인 124승 신기록을 작성한 박찬호가 일본 프로야구로 이동하게 되면서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인의 전설’이 사라지게 됐다. 저니맨으로 힘겹게 메이저리그 생활을 이어왔지만 팬들로서는 현실로 다가 온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퇴장이 진정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제 사실상 한국인 풀타임 메이저리거는 클리블랜드의 좌타자 추신수 한 명 밖에 없게 된 상태이다.
LA 다저스의 박찬호가 1994년 4월8일 애틀랜타전에 구원 등판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 그가 빅리그에서 100승을 돌파하고 124승 신기록까지 작성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02년 9월3일 최희섭이 시카고 컵스 유니폼을 입고 한국인 최초의 포지션 플레이어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5일 후인 9월8일 세인트루이스전에서 우완 제이슨 시몬타키로부터 데뷔 1호 솔로 홈런을 뽑아냈을 때만 해도 그가 허망하게 한국 프로야구로 돌아갈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2006년 3월 한국 야구는 두 경기 연속 일본을 꺾고 제1회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 4강에 진출하며 100년 역사의 꽃을 화려하게 피웠다. 당시 메이저리거 박찬호와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이 한국야구의 WBC 4강 신화 창조에 큰 몫을 해냈다. 그리고 2006년 시즌 초반인 5월22일 다저스타디움에서는 LA 다저스의 서재응과 콜로라도 김병현의 선발 맞대결이 펼쳐져 마침내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야구의 전성기가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해가 바뀐 2007년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인의 위상은 속절없이 추락을 거듭했다. 2006 시즌을 마치고 샌디에이고에서 자유 계약 선수가 된 박찬호가 개막을 목전에 두고도 새 팀을 찾지 못해 우려를 자아냈다. 결국 싼 값에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은 박찬호는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더니 단 1경기에 선발 등판한 뒤 방출의 수모를 겪었다. 이후 휴스턴의 트리플A 팀 선수가 됐다. 최희섭은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직후 LA 다저스에서 밀려났으며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뒤늦게 한국 야구로 복귀했다. 서재응은 2007시즌을 탬파베이의 제2 선발로 시작했으나 박찬호와 같은 지명 할당(designated for assignment) 과정을 거쳐 트리플A 팀으로 떨어졌다.
김병현은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됐다가 다시 웨이버 공시를 거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애리조나는 그에게 겨우 2경기 선발 등판의 기회만 주고 방출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인 선수들이 최악의 좌절을 겪은 시기가 바로 2007년이었던 것이다. 2006년 7월27일 시애틀에서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된 추신수(28)는 당시만 해도 마이너리그에 머물렀다. 추신수는 2007시즌 메이저리그에서 6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했다. 그가 주전급으로 발돋움한 시기는 2008년부터이다.
우연이겠지만 박찬호도 추신수가 급성장한 2008시즌 친정팀 LA 다저스에 복귀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때부터 메이저리그에서는 박찬호가 투수, 추신수가 타자로 한국 야구를 대표하게 됐다. 박찬호는 2009시즌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고 꿈에 그리던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으며 추신수는 클리블랜드의 간판타자로 떠올랐다.
박찬호는 올시즌 2009년 월드시리즈 상대였던 뉴욕 양키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다시 한번 우승 반지에 도전했으나 시즌 중 방출돼 피츠버그로 이적했다. 결국 그에게 주어진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선물은 일본인 투수 노모(123승)를 넘어서는 동양인 최다승 신기록이었다.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부와 명예를 모두 이룬 박찬호가 드디어 한국야구로 복귀할 것이라는 기대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본인도 가능성을 언급했다.
한국프로야구는 금년 592만 관중 신기록을 작성했고, 광주시가 새 구장 건설을 확정 발표했으며 창원시가 제9구단 유치를 공식 결정하는 등 ‘신(新) 르네상스’기를 열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에 박찬호가 한국 야구판에 등장하게 되면 내년 2011시즌은 사상 최초의 600만 관중 돌파는 물론 650만 명 이상도 확실해진다. 2011년에는 국제적인 스포츠 이벤트가 없어 프로야구가 한국 최고의 흥행 스포츠로 자리매김 할 것이 분명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박찬호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은 한국에서 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일본 행을 결정했다. 이로써 추신수가 홀로 남아있는 메이저리그는 멀어지고 일본 프로야구가 한국 팬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오게 됐다.
박찬호는 오릭스에서 선발 투수를 맡게 된다. 이승엽은 중심타선으로 나선다. 국제적인 활약의 관점에서 판단할 때 투타에서 한국야구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들이 일본의 한 팀에서 뛰게 됐다. 우리 팬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줄 것임은 분명하고 박찬호의 도전 정신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두려움이 있다면 혹시 잘못될 경우 겪을 수모와 좌절 때문에 일본 행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박찬호가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누구보다 굳게 믿었던 필자로서는 그의 일본 행이 왠지 많이 아쉽고 안타깝다. 왜일까? 많은 야구 관계자들과 팬들이 같은 마음은 아닐까?
/보경S&C㈜ 대표, 전 일간스포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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