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한화는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대변되는 팀이다. 화약을 전담 생산하는 모기업 이미지와 빙그레 시절부터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한 방으로 공포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불렸다. 규모가 가장 작은 대전구장(좌우 98m, 중앙 114m, 펜스높이 1.85m)도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한화에게 잘 어울린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는 달의 뒷면처럼 모르는 구석이 있기 마련. 한화는 개인통산 200승 투수 포함 8개 구단 중 가장 많은 100승 투수 4명을 배출해낸 팀이다. 송진우(201승)·정민철(154승)·한용덕(120승)·이상군(100승) 모두 한화에서 도합 575승을 합작해냈다. 여기에 208세이브를 올린 최고의 마무리투수 구대성도 한화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 타선 이면의 마운드 한화 전신 빙그레는 해태의 전성시대에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였다. ‘연습생 신화’ 장종훈을 필두로 이정훈·이강돈·유승안·강정길·고원부 등이 주축을 이룬 타선은 뜨거움 그 자체였다. 김영덕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본격적인 강팀 대열로 올라서기 시작한 1988년부터 빙그레는 타격 주요부문에 상위권에 랭크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팀 타율(0.276)·홈런(97개) 모두 1위에 올랐고, 1990년에도 팀 타율(0.270)·홈런(112개) 모두 2위에 랭크됐다. 1991년에도 팀 타율 1위(0.274) 및 홈런 2위(136개)를 차지했으며 1992년에는 한 시즌 최다 팀 홈런(146개) 기록까지 세웠다. 1988년부터 92년까지 5년간 빙그레는 포스트시즌 진출은 물론 4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해태와의 3차례 한국시리즈에서 도합 3승12패로 무기력하게 완패했으며, 해태가 떨어져 나간 1992년에도 ‘복병’ 롯데에게 1승 4패로 무릎을 꿇는 아픔을 겪었다. 최전성기 때 준우승만 4번이나 한 것은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이었다. 페넌트레이스 때 그렇게 뜨겁게 폭발했던 다이너마이트 타선도 가을 바람만 불어닥치면 불발탄이 되기 일쑤였다. 당시 4차례 한국시리즈에서 한화의 팀 타율은 2할3푼7리였으며 경기당 평균 득점은 3.35점에 불과했다. 당시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각종 타이틀을 휩쓸며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했으나 마운드는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이상군·한용덕·한희민·송진우 등 투수 면면은 화려했지만 선동렬이라는 당대 최고의 투수와 한 시대를 같이 보낸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장종훈이 홈런왕과 타점왕을 3차례나 차지하고 고원부와 이정훈이 타격왕을 번갈아가며 수상하며 이강돈이 최다안타 타이틀을 거머쥐는 동안 한화 투수들이 건져 올린 타이틀은 1992년 송진우의 다승왕 타이틀과 팀 방어율 1위(3.68)가 전부였다. 물론 막강한 마운드가 있었기에 빙그레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으나, ‘기록은 영원하다’는 김영덕 전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빙그레 마운드는 영원히 빛나는 광명이라기보다는 잠깐 빛나고 사라지는 유성이었다. ▲ 마운드 위의 전설들 1992년 4번째 준우승을 끝으로 빙그레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 장종훈과 함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구축한 타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부상과 부진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마운드도 조금씩 핀트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같은 악조건에서도 고졸 신인으로 빙그레의 마지막 전성기를 함께한 정민철과 1993년 암흑기의 시작과 함께 입단한 구대성의 존재는 마운드 위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선동렬 삼성 감독이 현역시절 직접 후계자로 지목한 정민철은 1990년대 중후반까지 선발진에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했으며, 구대성은 1996년 다승(18승)·방어율(1.88)·구원(40세이브포인트) 부문 3관왕과 함께 MVP를 차지는 괴력을 발휘하며 한화의 뒷문을 철통같이 지켰다. 정민철과 구대성이 분투한 가운데 송진우까지 팔꿈치 부상으로 1995~96년, 2년간 잠시 슬럼프를 겪었지만 이때 서클체인지업이라는 신무기 장착과 함께 더욱 무서운 투수로 돌아왔다. 그 결정체가 바로 1999년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20세기 최후의 한국시리즈에서 한화는 롯데를 4승1패로 격추시키며 최후의 승자로서 첫 우승트로피를 차지했다. 당시 한화는 정민철-송진우-이상목으로 구성된 막강 원투스리 펀치와 함께 구대성이라는 슈퍼마무리의 힘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결정체를 이뤄냈다. 이후 정민철-구대성이 차례로 일본으로 진출, 1999년 우승은 전설들이 한화에 남긴 마지막 유산이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역전의 용사들은 2006년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라는 또 하나의 값진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송진우는 변함없이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고 정민철은 기교파 투수로 제2의 전성시대를 준비했다. 5년간 일본-미국을 건너 돌아온 구대성은 말 그대로 구대성이었다. 게다가 류현진이라는 괴물의 등장은 한화 마운드의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베테랑들이 주축으로 구성된 마운드는 필경 부상과 노쇠화라는 변수에 발목을 잡히기 마련이지만 류현진이라는 괴물은 한화 마운드의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역할까지 해냈다. 물론 살아있는 전설이자 교본이며 지침서가 되는 전설들이 곁에 있었기에 체인지업을 장착하고 능수능란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괴물 류현진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 다이너마이트 마운드 올 시즌 한화는 팀 방어율 3위(3.48)에 올라있다. 하지만 선발진 방어율은 1위(3.50)이며 선발진 경기당 투구이닝 역시 1위(5.96이닝)를 마크하고 있다. 안영명을 제외하면 믿을 만한 투수가 없는 불펜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옥에 티라 할 만하지만 선발투수 퀄리티 스타트가 58회로 전체 1위이며 5회 이전 조기강판도 13회로 가장 적다. 류현진-정민철-세드릭 바워스는 선발 로테이션을 한 차례도 거르지 않으며 마운드를 이끌고 있다. 특히 류현진과 정민철은 두산 다니엘 리오스-맷 랜들에 버금가는 막강 원투펀치를 형성했다. 류현진과 정민철은 320⅔이닝 24승11패 방어율 2.92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합작해내고 있다. 문동환이 정상 컨디션을 회복한다면 선발진은 그야말로 물샐 틈조차 없어진다. 포스트시즌 진출 커트라인인 4위 자리를 놓고 벌인 5위 LG와의 잠실 2경기에서 한화는 막강 원투펀치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류현진은 8월 31일 기선제압용으로 나선 첫 머리에서 9이닝 7피안타 무사사구 8탈삼진 2실점의 완투승으로 5-2 승리를 주도했다. 최고 시속 154km라는 광속구로 LG 타자들뿐만 아니라 경기장 전체 분위기를 압도했다. 정민철도 지난 2일 경기에 선발등판, 6⅓이닝 동안 8안타를 맞았으나 역시 무사사구의 완벽한 제구력으로 LG 타선을 2실점으로 막고 팀의 7-2 승리를 이끌었다. 확실한 선발투수 2명을 앞세워 중요한 연전을 승리로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다이너마이트 타선도 그 순간만큼은 조연이었다. 최근 한화는 들쭉날쭉한 타선으로 고민이 크다. 오죽했으면 김인식 감독이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일컬어 불발탄이라 했을까. 하지만 그래도 한화가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건 마운드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세대교체가 필요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절대목표를 향해 치닫고 있는 올 시즌에 한해서는 논외로 되어야 할 부분이다. 기대대로 LG와의 2연전에서 결정적인 순간 힘을 발휘한 것도 마운드였다. 방망이는 차가워졌지만 마운드 위의 투수들은 더욱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물론 마운드 위의 투수들은 차가운 냉정함을 유지해야한다. 하지만 한화에는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과 심장을 뜨겁게 하는 투수들이 많다. 불같은 강속구와 불같은 열정 그리고 불같은 배짱이 한화 마운드에 녹여져있다. 그들을 다이너마이트 마운드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이유다. 류현진-정민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