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맨' 이승학, 두산의 별이 되다
OSEN 기자
발행 2007.09.19 08: 29

[OSEN=이상학 객원기자] 먼 발치에서 얼핏 보면 최준석이 투수로 전향해 마운드에 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준석보다 키가 더 크고 살집이 없다. 체격 조건(192cm, 105kg)만 놓고 볼 때는 타석에서 위압적인 모습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며 상대 투수를 겁주는 것이 어울릴 것 같지만 그는 엄연히 투수다. 그것도 데뷔 첫 해부터 당당히 7승에 2점대 방어율(2.25)을 기록하는 있는 수준급 투수다. 그는 바로 두산 이승학(28)이다. ▲ 두둑한 배짱 지난 18일 잠실 LG전은 두산에 매우 중요한 일전이었다. ‘서울 라이벌’ LG와 마지막 18차전이라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직행 프리미엄이 주어지는 2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잡아야 할 경기였기 때문이었다. 잔여 경기가 삼성에 비해 5게임이나 적은 두산으로서는 1.5경기를 앞서고 있지만 사실상 칼자루를 삼성에게 내준 상황이다. 남은 경기들을 총력전으로 잡아야 할 이유였다. 하지만 LG는 라이벌 의식이 발동했는지 마지막까지 두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특히 9회말에는 1사 3루의 끝내기 찬스까지 만들며 두산의 목을 옥죄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승학이 빛을 발했다. 두산 김경문 감독은 최근 제3선발로 자리매김한 이승학을 이날 경기 6회부터 투입시키는 승부수를 띄웠다. 6회부터 8회까지 1안타 1볼넷으로 LG 타선을 꽁꽁 봉쇄한 이승학은 그러나 9회 LG 선두타자 최동수를 볼넷으로 보내며 위기를 자초했다. 희생번트와 폭투가 이어지면서 무사 1루는 1사 3루로 급변했다. 모두가 후속타자의 고의4구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학의 선택은 놀랍게도 정면 승부였다. 자칫 경기를 허무하게 내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그대로 정면 돌파했다. 1사 3루에서 손인호에게 볼카운트 1-3까지 몰렸지만 이승학은 5구째를 과감하게 한가운데 직구로 꽂으며 2-3 풀카운트를 만들었다. 오히려 다급해진 쪽은 손인호였다. 한 차례 파울이 나온 후 7구째 이승학이 던진 승부구는 미국에서 갈고 닦은 반포크볼(스플리터). 손인호의 방망이는 타이밍을 잃고 맥없이 돌아갔다. 헛스윙 삼진. 끝내기에 일가견이 있는 조인성이 다음 타자였지만, 이승학은 거칠 것이 없었다. 볼카운트 2-1에서 결정구로 슬라이더를 택했고 조인성의 방망이는 허공을 갈랐다. 또 다시 헛스윙 삼진. 위기를 벗어나는 순간 거구의 이승학은 불끈 쥔 주먹으로 허공을 향해 짧지만 강한 어퍼컷을 날렸다. 이승학의 두둑한 배짱과 김경문 감독의 두터운 믿음은 무모하리라는 예상을 무참히 깨고 대반전을 일으켰다. 위기 뒤 찬스라는 오래된 야구의 명제처럼 두산은 연장 10회초 공격에서 고영민의 결승타로 선취점이자 결승점을 얻어냈고 결국 1-0으로 승리했다. 고영민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돌아갔지만, 두둑한 배짱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며 승리의 디딤돌을 놓은 승리투수 이승학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경기였다. 지난 6월9일 잠실 삼성전에서 양준혁의 개인통산 2000안타의 제물이 됐지만 정면 승부를 당연하게 생각한 이승학의 두둑한 배짱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 '빅맨' 이승학 부산공고 시절부터 유망한 투수로 주목받은 이승학은 단국대 1학년 재학 중이었던 2001년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했다. 그러나 미국진출 첫 해부터 허리디스크로 고생하는 등 비운을 겪기 시작했다. 특히 허리 수술로 구속이 떨어지자 자신감까지 잃었다. 메이저리그 진입 기회가 번번이 물거품된 것도 이승학에게는 맥 빠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제구력과 변화구를 바탕으로 한 경기 운영 능력 그리고 참을성을 기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메이저리그에 오르지 못한 채 국내로 돌아왔지만, 실패는 반드시 교훈과 성장이라는 밑거름을 안기기 마련이었다. 필라델피아와 6년 계약을 채웠지만 메이저리그 진입을 노리기에 28살이라는 나이는 마이너리그에서 노장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꿈을 접고 국내로 돌아온 이승학은 올 초만 하더라도 롯데의 해외파 우선지명에서 송승준과 선의의 경쟁을 했지만, 롯데의 선택은 ‘파워피처’ 송승준이었다. 하지만 실망할 것은 없었다. 4월 2일 해외파 특별지명에서 3번째 지명권을 얻은 두산은 즉시 전력감으로 판단하고 이승학을 영입했다. 결과적으로 두산행은 이승학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두산 마운드의 진입 장벽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고 탄탄한 수비수들의 도움아래 보다 편안한 마음에서 피칭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즌 전 최하위 후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상위권을 질주한 팀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사실 시즌 중반까지 이승학도 여타 복귀 해외파들처럼 구위나 스태미나가 현격하게 떨어졌다. 겨우내 훈련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6월 중순 2군으로 내려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컨디션을 회복했다. 군살을 쫙 빼고 어깨도 달궜다.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7월 1군 복귀 후 치른 15경기에서 6승1패 방어율 2.13 WHIP 1.02 피안타율 2할1푼7리라는 가공할 만한 성적을 내고 있다. 8월 이후에는 선발로도 5경기에 등판해 4승이나 챙겼다. 직구 스피드를 시속 140kmEO 중반까지 끌어올릴 정도로 구위를 회복했고, 큰 신장에서 내FL찍는 볼이 타자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결정구로 던지는 반포크볼이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다. 기본적으로 이승학은 큰 체구에 걸 맞지 않게 기교파에 가까운 투수다. 제구력이 좋은 데다 반포크볼·슬라이더·체인지업 등 다양한 변화구들을 던지기 때문이다. 올 시즌에도 9이닝당 볼넷은 2.4개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열정만은 웬만한 파워피처들을 능가한다. 9회말 1사 3루 끝내기 위기에서도 정면승부를 택할 정도로 두둑한 배짱은 그의 덩치가 괜히 거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무엇보다 팀 동료들과 잘 융화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물론 이승학의 체구가 워낙 커 눈에 잘 띄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6년간 미국에서만 있다 올해에야 막 국내로 돌아온 것을 감안하면 적응 속도가 매우 빠르다. 커피에 녹아든 설탕처럼 자신을 철저하게 녹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 별을 쏘지 못한 ‘빅맨’ 이승학은 이렇게 두산의 새로운 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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