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굴곡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특히 6개월 여 동안 휴식일을 빼고 매일 경기가 열리는 프로야구에서 굴곡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그 중에서도 매일 경기에 출장하는 타자들에게 그 굴곡은 잦은 편이다. 그래서 흔히들 ‘슬럼프가 짧을수록 좋은 선수’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찾아올 수 있지만, 어떻게 빨리 슬럼프를 극복하느냐가 좋은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를 구분 짓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한화 이범호(26)에게도 2007시즌은 굴곡과 슬럼프의 연속이다. ▲ 롤러코스터와 꾸준함 이범호의 4월은 조용했다. 타율 2할1푼8리·3홈런·4타점. 하지만 강타자들에게 4월은 어차피 몸 푸는 시점이다. 날이 풀리고 투수들의 공에 대한 적응을 끝마칠 5월부터가 본격적인 시즌 시작이다. 그러나 5월에도 이범호는 침묵했다. 5월 타율이 1할9푼3리로 크게 곤두박질쳤고 3홈런·14타점에 만족해야 했다. 이 즈음부터 김인식 감독의 공개적인 질책도 이어졌다. 한화의 터줏대감처럼 느껴졌던 이범호에게 트레이드설까지 들렸다. 하지만 이범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성적이 그만큼 실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범호 스스로도 당시를 회상하며 “사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감독님의 질책은 당연했다”고 말한다. 다행히 6월부터는 이범호에게 어울리는 성적표가 나오기 시작했다. 6월에만 타율 3할2푼9리·8홈런·17타점으로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트레이드설은 언제 있었냐는 듯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이범호는 변함없이 한화의 핫코너와 5번 타자를 맡았다. 4~5월의 부진은 어디까지나 ‘장기적 슬럼프’로 여겨졌다. 그러나 7월에 타율 2할7푼5리·2홈런·8타점이라는 평범한 성적을 남기더니 8월에는 다시 2할9리·1홈런·5타점이라는 악몽 같은 성적을 내고 말았다. 슬럼프가 자주 찾아왔을 뿐더러 길기도 정말 길었다. 슬럼프 대처 방법을 논할 때 이범호는 결코 좋은 타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범호에게는 홈런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야구의 꽃은 홈런이고 언제부턴가 이범호의 홈런은 한화의 꽃이 되어 있었다. 타율이 롤러코스터 타듯 오르락내리락한 올 시즌에도 홈런만큼은 꾸준히 생산했다. 프로야구 사상 12번째로 4년 연속 20홈런을 달성한 거포가 바로 이범호다. 타율은 롤러코스터지만 홈런은 꾸준하다. 체구는 크지 않지만 힘을 모아 스윙하는 타법이 오늘날 이범호를 만들었다. 특히 3루수로는 최초로 4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했다. 김용희 한대화 홍현우 김동주 등 역대 공격형 3루수들도 4년 연속으로 20홈런을 치지는 못했다. 이범호는 “작은 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다보니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라며 겸손해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한화의 투수들은 전설을 넘어 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또 이범호에 앞서 4년 연속 20홈런을 달성한 11명은 11명은 1루수 및 지명타자가 6명이고 외야수가 5명이다. 상대적으로 수비 부담이 있는 3루수인 이범호의 꾸준한 홈런포가 더욱 돋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 야구는 계속된다 지난 26일 현재 이범호의 시즌 타율은 2할4푼7리로 2할5푼도 되지 않는다. 이범호의 타율은 올 시즌 규정타석을 채운 44명의 타자 중 전체 39위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는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돌파한 2004년(0.308)을 기점으로 매년 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5년 2할7푼3리, 2006년 2할5푼7리 그리고 올해까지 타율이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 와중에도 20홈런을 기본적으로 찍어내는 거포 본능을 발휘했다. 물론 장타를 의식한 스윙은 필연적으로 정교함의 약화를 부른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범호의 성장을 바라는 코칭스태프나 팬들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 밖에 없는 성적표다. 그렇다면 과연 이범호의 타격 정확성이 크게 결여된 것일까. 타격의 정확성은 일단 얼마나 잘 맞히느냐가 일차적인 관건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공을 잘 보고 고를 수 있느냐 여부도 중요하다. 즉, 볼넷을 얻어낼 수 있는 선구안도 타격의 정확성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범호의 올 시즌 볼넷은 69개다. 데뷔 후 가장 많은 수치. 반면 삼진은 69개로 풀타임 주전이 된 2004년 이후 가장 적다. 볼넷과 삼진의 비율이 1대1인 것도 처음이다. 안타를 만들어내지 못해 타율을 관리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타석에서 조급해 하지 않고 참을성을 발휘하며 볼넷으로 걸어나는 것에도 힘을 썼다. 다행히 8월 중순부터 이범호는 보이지 않게 조금씩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다. 8월 19일 대전 두산전부터 26일 대전 삼성전까지 최근 20경기에서 이범호는 72타수 22안타, 타율 3할6리·4홈런·17타점을 기록 중이다. 한 경기 2안타 이상의 멀티히트도 8차례나 때려냈다. 특히 홈런 4방이 모두 영양가 만점이었다. 9월 7일 대전 KIA전에서는 결승 2점 홈런, 9월12일 대전 LG전에서는 쐐기를 박는 만루포를 터뜨렸고 9월 26일 삼성을 상대로는 선제 결승 스리런홈런과 그랜드슬램을 작렬시켰다. 이범호가 올 시즌 기록한 9개의 결승타중 홈런이 무려 6개나 된다. 이범호는 기본적으로 장타를 노리는 타자다. 기본적인 정확성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장타를 생산하는 것이 임무다. 장타자에게 삼진은 세금과도 같은 것이다. 이범호 역시 “삼진도 많지만 볼넷도 많다.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쳐서 아웃되는 것이나 삼진으로 아웃되는 것이나 아웃되는 건 똑같다”며 삼진에 개의치 않고 지금의 스윙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여전히 타율에 대한 걱정은 크다. “올해는 유난히 굴곡이 심했다. 좋은 날, 안 좋은 날이 많았다. 특히 타율에 대한 생각이 많았고 느낀 것도 많았다”는 것이 이범호의 말이다. 550경기 연속 출장 중인 이범호는 현역 최다 연속 출장 기록을 연일 갈아치우고 있는 주인공이다. 그만큼 꾸준하게 출장해 팀에 공헌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롤러코스터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리고 그의 꾸준함은 쌓여가는 기록뿐만 아니라 의지로도 비쳐진다. “야구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된다. 앞으로 계속해 약점을 보완해 나갈 것이다”고 말하는 이범호에게 만족이란 롤러코스터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성에 찰 때까지 꾸준하게 축적되는 마음의 의지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