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이제 그에게 단순히 야구 감독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최후의 방점을 찍지 못했지만 이만 하면 야구의 거장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SK 김성근 감독(65).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령 감독의 감투까지 안고 있는 그가 드디어 일을 냈다. 김 감독의 SK는 지난 28일 잠실 LG전에서 7-2로 승리하며 121경기 만에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지었다. 지난 2000년 창단 후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이자 프로감독 경력 16년째인 김 감독에게도 황홀한 첫 경험이었다. ▲ 리빌딩 전문가 김성근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리빌딩 전문가라 할 만하다. 전력이 약한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음지의 야구인’이라는 세간의 평가대로 패배 의식이 가득한 팀에 끈끈한 근성과 승리의 기운을 불어넣는 힘이 있었다. 태평양(1989~90년)·쌍방울(1996~99년)·LG(2001~02년) 시절은 김 감독의 능력이 가장 극대화된 때였다. 비록 삼성(1991~92년)이라는 유력구단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당시 삼성이 세대교체의 과도기였고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쓰러지길 반복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4년간 한국야구를 떠나 있었던 김 감독은 지난해 10월 SK 사령탑으로 취임했다. 김 감독의 기준에서 SK는 약체였다. 물론 김 감독이 과거 지휘하기 전이었던 태평양이나 쌍방울처럼 패배의식으로 가득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선수들이 툭하면 부상을 이유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팀이 좀처럼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힘을 아낌없이 발휘할 줄을 몰랐다. 김 감독은 가을 마무리훈련에서 SK 선수들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기본기가 되어 있지 않았고 정신력도 흐지부지했다. 이 때문에 김 감독에게는 2년이라는 계약기간이 짧게 느껴진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 SK는 시즌 내내 독주하며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했다. ‘조련사’ 김 감독의 힘이다. 가을 마무리훈련부터 겨울 동계훈련 그리고 봄 전지훈련까지 김 감독은 선수들을 강하게 조련했다. 젊은 선수들에게도 기회를 약속하며 사기를 북돋았고, 베테랑 선수들에게는 등 뒤의 이름표를 지울 것을 설파하며 새로운 자극제를 불어넣었다. 유니폼에 이름표를 지우고 선수의 가슴 안 열정과 의지를 바라보기로 선언했다. 이른바 무한경쟁 체제였다. 김 감독은 전지훈련 중 이동시간에 쫓기자 양복을 입고 선수들을 지도했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60대 노감독이 그 정도로 열정을 보이는데 선수들에게 동기가 부여되지 않을 리 만무했다. 시범경기부터 시즌 초반까지 SK가 돌풍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저러다 제 풀에 지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이 많았지만, 시즌을 거듭할수록 내부 경쟁력이 더욱 두터워진 SK는 탄탄한 선수층을 앞세워 결코 제 풀에 쓰러지지 않았다.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부상선수가 없었다지만 SK도 부상선수가 많은 팀이었다. 이승호·엄정욱은 아예 임의탈퇴됐고, 신승현은 1경기만 던지고 시즌-아웃됐다. 이진영·이호준 등 중심타자들도 부상으로 들락날락했다. SK에는 부상선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부상선수들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나머지 선수들이 잘했던 것이다. 역시 ‘조련사’ 김성근의 힘이다. ▲ 야구의 거장 김 감독에게 야구는 밥이다. 매일 반드시 섭취해야 하는 필수 식품과 같다. 잘 알려졌다시피 김 감독은 취미도 야구다. 한시라도 야구와 떨어지지 않는다. 경기가 없는 날에는 연예인야구라도 보며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바로 김 감독이다. 취미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김 감독에게는 행복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예부터 김 감독은 항상 필요한 노동보다 더 많은 노동을 했다. 피곤하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야구로 자아를 찾는 스타일이다. 모두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정한 거장은 자신의 일을 즐기고 사랑할 줄 안다. 김 감독이 딱 그렇다. 그러나 야구를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만으로는 결코 거장이 될 수 없다. 김 감독이 야구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남다른 조련과 지휘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감독의 리더십은 마치 응축해 놓은 엑기스를 적절한 타이밍에 공급해 교훈을 심어 넣는 연출력을 지닌 영화의 거장, 그리고 흩어진 이야기를 유려하게 직조해내는 소설의 문호와 다를 바 없다.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승리라는 절대 목적을 향해 커피 속 설탕처럼 선수 개개인을 철저하게 녹여낸 ‘김성근식 토털 베이스볼’은 페넌트레이스 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승리에 목마른 인천 팬들은 98.4%의 전년 대비 관중증가율로 화답했다. 영화의 거장이 흥행에 성공하고 소설의 문호가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킨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비단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김 감독은 지난해 SK에 취임할 때부터 선수들에게 실력뿐만 아니라 확실한 목적 의식과 정신력을 강조했다. ‘야구를 왜 해야 하는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야구를 보다 야구답게 하도록 유도했다. 행동 없는 비전은 한낱 백일몽이고, 비전 없는 행동은 악몽이다. 행동이든 비전이든 어느 하나가 결여돼 있으면 결과는 뻔하다. 김 감독은 동기부여를 피워내는 연금술을 발휘했고, 젊은 선수들이든 베테랑 선수들이든 가릴 것 없이 김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고 실행으로 옮겼다. 김 감독은 시즌 중 김재현·박재홍 등 베테랑 스타선수들은 물론 외국인선수 케니 레이번까지 2군으로 강등시킬 정도로 과감하고 개혁적으로 팀을 가꾸어나갔다. 공수에 걸친 철저한 균형으로 팀의 번영을 불렀다. 물론 거장이라 해서 모든 것이 옳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올 시즌 SK는 이런저런 이유로 구설수에 많이 올랐다. 잦은 투수교체와 엿가락처럼 늘어진 경기시간 그리고 빈볼시비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투수교체는 감독의 고유 권한이며 경기 시간은 임의대로 조절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빈볼 시비도 야구의 일부분이다. 이 같은 구설수들은 순전히 SK가 독주 체제를 구축한 영향이 크다. ‘재미없는 야구’라는 지독한 꼬리표도 마찬가지. 재미없는 야구는 말은 기업의 홍보 효과라는 말만큼이나 모호하며 객관적 수치도 뽑기 어렵다. 하지만 SK는 올 시즌 8개 구단 중 가장 높은 관중증가율을 보인 팀이다. 게다가 SK가 잘 나갈수록 나머지 팀들에게는 SK 야구가 재미있는 야구가 될 수가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이 모든 것 역시 거장이 안고 가야할 짐이지만 말이다. 그동안 유독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김 감독에게 올 시즌 페넌트레이스 우승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김 감독 본인은 한국시리즈 우승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는 반응이지만 6개월여의 기나긴 마라톤에서 가장 먼저 1등 테이프를 끊은 것만으로도 김 감독과 SK는 2007시즌의 승자라 할 만하다. 페넌트레이스 우승만으로도 완벽한 성공이다. 거장에게는 우승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