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대전, 이상학 객원기자] 1만여 관중들이 거대한 썰물처럼 빠져나간 경기장은 쌀쌀한 가을바람처럼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몇몇 관중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격려의 응원을 보냈지만 그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경기장을 울렸고, 홈팬들 앞에서 무기력한 패배를 당한 선수단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17일 밤 대전구장의 풍경이었다. 배수의 진을 친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마저 두산에 0-6으로 완패, 시리즈 전적 3전 전패로 2007시즌을 마감한 한화의 마지막은 아쉬움이 한가득했다. 하지만 벚꽃이 미련 없이 지는 이유는 내년에 다시 피기 때문이다. 2007년 가을, 한화는 미련없이 졌지만 장밋빛 미래를 기약했다. ▲ 부상악재와 한계 올 시즌 한화의 목표는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물론 8개 구단 모두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시리즈 우승이지만 2007시즌을 준비하는 한화의 마음가짐은 유독 달랐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구단 안팎에서의 기대치가 한껏 올라간 상황이었고, 우승을 차지할 적기라는 판단이 섰다. 김인식 감독도 이례적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목표로 선언했다. 유머와 위트가 넘치지만 허풍은 하지 않는 김 감독이었기에 그의 목표 선언은 더욱 남달랐다. 한화팬들 사이에서도 2004년 7위에서 2005년 3위 그리고 지난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한 단계씩 팀 성적이 올랐으니 올해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타이밍이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부상 악재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선발진을 담당해야 할 송진우가 팔꿈치 통증으로 개막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마무리투수 구대성은 개막전에서 왼 무릎을 다쳤다. 악재는 마치 돌림병처럼 한화 선수단을 휘감았다. 송진우와 구대성이 복귀한 6월초에는 문동환이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혹서기에는 제이콥 크루즈의 왼쪽 아킬레스건에 탈이 났고, 김태균도 시즌 막판 어깨 부상으로 고생했다. 특히 구대성·송진우·문동환은 부상 이후 눈에 띄게 노쇠해졌다. 결정적으로 포스트시즌에서 정민철마저 불의의 허리부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한화의 포스트시즌 운용도 뒤틀리고 말았다. 부상으로 시작해 부상으로 마감된 악재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부상 악재는 한화뿐만 아니라 나머지 7개 구단들도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다. 물론 올 시즌 한화는 KIA·삼성과 함께 인조잔디를 홈으로 쓰는 팀답게 부상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올 시즌 팀이 가진 한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선발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얕은 불펜은 안영명의 과부하를 야기했다. 중반부터 균열이 일어난 선발진에서는 류현진이 고생해야 했다. 게다가 다이너마이트로 불렸던 타선은 더 이상 화약을 장전하지 못했다. 6월까지는 괜찮았지만 7월을 기점으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심지는 완전히 물에 젖어버리고 말았다. 팀 타율은 절대적 지표가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타격성적의 기본이다. 그러나 올 시즌 한화의 팀 타율은 최하위(0.254)였다. 비단 방망이뿐만 아니라 작전을 수행하고 상대를 흔들어 놓는 세밀함에서도 한화는 크게 부족했다. ▲ 세대교체와 미래 한화는 전설적인 베테랑들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203승 투수’ 송진우, ‘213세이브 투수’ 구대성, ‘155승 투수’ 정민철은 한국프로야구에서 길이 남을 사상 최고의 투수들이다. ‘빅3’와 함께 문동환·최영필·김민재·조원우·이영우·김인철 등이 30대 베테랑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올 시즌을 기점으로 퇴조 기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한화에도 ‘정말로’ 세대교체가 시급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정민철과 김민재는 각각 부활과 건재를 과시하고 있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송진우와 구대성이 천년만년 공을 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플레이오프 3차전 완패 후 김인식 감독도 세대교체에 대해 깊은 고민을 드러냈다. “세대교체 문제는 벌써부터 생각했지만 쉽지가 않다. 신인이나 젊은 선수들의 기량이 처져 노장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송진우 같은 노장들도 젊은 선수들 못지않게 열심히 한다”며 고충을 나타냈다. 과거 김 감독은 신예들을 기용하는 데 남다른 능력을 보였다. 쌍방울에서는 김기태·김원형, OB 및 두산에서는 심정수·정수근·박명환·진필중 등이 그랬다. 그러나 당장 우승전력을 갖춘 상황에서 베테랑들을 인위적으로 제외하고 불확실한 젊은 피들을 중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시즌 막판부터 한화에도 세대교체의 가능성과 함께 밝은 미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구단 역대 최고 계약금(5억5000만원)을 받고 입단한 유원상은 자신에게 투자된 거액이 아버지 유승안 전 한화 감독의 퇴직금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내기 시작했다. 특히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모두 구원등판해 9⅔이닝을 던져 1자책점만을 허용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김인식 감독도 “앞으로 유원상이 류현진과 함께 팀의 좌우 에이스로 성장할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외에 안영명과 양훈 등도 마운드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김태균과 이범호가 중심이 된 야수진에서도 고동진·한상훈에 연경흠·김태완 등도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세대교체는 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만큼 내년에는 보다 젊어진 독수리를 기대해도 좋을 전망이다. ▲ 휴머니즘과 스타 올 시즌 한화에게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적만이 아니다. 2005년 김인식 감독 부임을 기점으로 대전에 야구열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화는 지난 1999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시작으로 올 플레이오프 3차전까지 포스트시즌에서 14경기 연속으로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1만500명밖에 되지 않는 대전구장의 수용인원을 감안하면 그리 대단한 기록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관중이 없을 때 아담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대전구장을 메운 관중들을 살펴보면 숫자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대전구장을 찾은 관중들의 모습은 흡사 콘서트장을 찾은 관객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화는 올 시즌 11년 만에 30만 관중을 돌파했다. 총 관중은 32만2537명이며 경기당 평균 관중은 5120명이다. 지난해보다 31.8%가 증가한 수치로 올 시즌 전국적인 프로야구 부흥을 고려할 때 평균적인 수치다. 하지만 ‘야구 불모지’ 성격이 강했던 대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 고무적인 숫자다. 특히 김인식 감독의 선 굵은 야구는 때때로 골수팬들의 한숨을 자아내게도 했으나 일반인들까지 야구의 흥미와 재미를 느끼게 만들었다. 선수들이 기계처럼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주자들을 홈으로 불러들이지는 못했지만, 시원하게 방망이를 돌려 실패를 한 번에 만회할 때 팬들은 야구에서 휴머니즘을 느꼈다. 김인식 야구와 한화 야구의 매력이었다. 한화의 매력은 스타선수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한화에는 송진우·구대성·정민철 같은 전설적인 스타들도 있지만, 김태균·이범호·류현진 같은 젊은 스타들도 넘친다. 이들의 인기는 연고지 대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넓혀질 조짐이다. 김태균의 별명은 그의 홈런 못지않게 팬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끔 만들었고, 이범호는 팬들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다가가 꽃이 되었다. 류현진은 이제 20살의 어린 투수지만 압도적인 피칭으로 마운드의 왕으로 군림했다. 특히 류현진은 명실상부한 전국구 스타가 됐지만 초심을 잃지 않으며 젊은 스타가 가야 할 정도를 걷고 있다. “주머니도 두둑해졌고 여기저기서 알아볼 정도로 인기도 많아졌다. 어린 나이에 우쭐할 만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한화 이경재 사장의 말이다. 류현진도 류현진이지만 살아있는 전설들과 함께 하는 팀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일 것이다. 비록 목표로 삼은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다. ‘1년 중 가장 슬픈 날이 야구가 끝나는 날’이라는 말처럼 플레이오프 3차전이 종료된 17일 밤 한화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침표는 곧 새로운 시작이다. 내년에도 한화 야구는 특유의 휴머니즘과 스타들을 앞세워 대전팬들을 비롯한 야구팬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