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 야구, '한 점의 추상화'가 되다
OSEN 기자
발행 2007.10.24 09: 29

[OSEN=인천, 이상학 객원기자] 언제부턴가 두산 야구에는 '창조적인 플레이'라는 평가가 붙기 시작했다. 야구와 창조성이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 밝혀진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야구인들과 팬들은 두산이 녹색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야구를 보고는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두산의 야구를 지켜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거나 박수를 치른 것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과거 두산은 우직한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불도저 성격이 강한 팀이었다. 한 번에 실패를 만회하는 '뚝심야구'는 팬들에게 야구의 휴머니즘을 선사했다. 뚝심이라는 기조는 오래된 전통이 되어 여전히 두산의 절대적 색채로 빛을 강렬히 뿜어내고 있다. 여기에 창조력이라는 색채가 덧칠됐다. 한화와 플레이오프를 3연승으로 조기 종결시키고 SK와 한국시리즈에서도 적지에서 2연승을 거두며 개가를 올리고 있는 두산의 야구는 풍경화나 정밀묘사와는 거리가 먼 한 점의 추상화에 가까웠다.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한 편의 야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 녹색 그라운드의 추상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 아니 야구 감독이 바로 김경문 감독(49)이다. 선수들의 능동적 야구 2005년을 기점으로 프로야구는 극심한 투고타저 현상을 말미암아 스몰볼이 대유행했다. 다수의 야구팬들은 시원하게 방망이를 돌리는 대신 방망이를 반쯤 잡고 내민 채 번트를 대는 타자들의 모습에 그만 신물이 나고 말았다. 틀에 박힌 진행 과정으로 팬들이 야구에 몰입하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프로는 성적을 내야 하는 무대였고, 유행은 곧 대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김경문 감독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강공으로 밀어붙였다. 과거 김인식 한화 감독을 보좌한 영향인지 공격적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이다. 대다수 구단의 팬들이 감독들에게 '번트 좀 대지 말라'고 애원을 할 때 두산팬들은 김 감독에게 '번트 좀 대라'고 종용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연출될 정도였다. 올 시즌에도 두산의 희생번트는 68개로 8개 구단 중 가장 적었다. 이같은 김경문식 강공의 근저에는 역시 선수들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믿음이 없으면 강공도 없기 마련이다. 비단 타격뿐만 아니다. 주루플레이에 있어서도 두산은 적극적이다. 과거에는 정수근과 김민호 정도를 제외하면 위협적인 주자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종욱, 고영민, 민병헌, 김현수는 물론 김동주까지 상대가 빈 틈을 보이면 머리와 발을 함께 움직인다. 베이스러닝은 자칫 경기의 흐름을 스스로 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 효과만큼이나 마이너스 요인도 많다. 하지만 도루 실패 또는 베이스러닝 실패가 두려워서 달리지 못한다면, 타석에 아웃될 것이 두려워 들어서지 말아야 마땅하다. 수세적인 야구는 한계가 뚜렷하다. 하지만 능동적인 야구는 한계가 없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하는 데다 위험부담도 크지만 자고로 리스크가 높을수록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능동적 태도가 비록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을지라도 수세적 태도는 실패를 보장하고도 남는다. 선수들로 하여금 능동적인 야구를 할 수 있게끔 하는 '김경문 야구'를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치밀하게 계산된 준비 영화 시리즈의 돈 콜레오네는 언제나 여유가 있고 자신감이 넘친다. 대부답게 배짱이 좋아서가 아니라 치밀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사전 준비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김경문 감독도 돈 콜레오네 타입이다. 겉으로는 선수들에게 맡기는 야구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언제나 마음 속으로 준비를 하고 대비를 하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부상당한 이대수 대신 오재원을 선발 유격수로 과감하게 출전시킨 것에 대해 "올해뿐만 아니라 내후년에도 계속 뛰어야 할 선수다. 감독은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 시즌 주력멤버로 발돋움한 투타 주요선수들도 이같은 과정에서 배출됐다. 특히 주전 포수로 자리매김한 채상병은 트레이드 실패 케이스로 분류됐지만 올 시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기량이 상병에서 병장으로 진급하며 트레이드 평가 역전에 성공했다. 두산의 포수난을 예견하고 먼 미래를 내다보며 채상병을 데려온 김 감독의 혜안이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차전을 앞두고 김 감독은 1차전 잔루가 많았던 것에 대한 보완책을 묻자 "선수들이 잔루를 줄여줄 것이다"고 짧게 말했다. 작전을 통해 잔루를 줄이기 위한 대비책을 기대했지만 김 감독은 어디까지나 선수 중심의 야구를 강조했다. 실제로 1차전에서 무려 12개였던 잔루는 2차전에서 절반인 6개로 줄었다. 특히 홍성흔이 6회초 무사 1·2루에서 스스로 스리번트를 감행한 것이 하이라이트였다. 홍성흔의 희생번트는 이대수의 결승 2타점 적시타로 이어졌다. 두산으로서는 감독이 시키지 않아도 선수들이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 능동적 야구가 다시 한 번 실행되는 순간이었다. 경기 후 김 감독은 홍성흔의 희생번트에 대해 "감독 입장에서 매우 고마운 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야구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선수들이 많아야 진정한 강팀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능동적인 야구가 그냥 능동적인 사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이어지게 된 데는 이처럼 치밀하게 계산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05년 아픔, 절반을 지우다 한국시리즈 2차전을 앞두고 문학구장 3루측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김경문 감독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표정에는 한결 여유가 배어 있었다. 전날 한국시리즈 1차전 완승으로 어느 정도 부담을 던 모습이었다. 지난 2005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4전 전패로 무기력하게 물러난 김 감독에게 1차전 승리는 생애 첫 감독 자격으로 거둔 한국시리즈 승리였다. 비록 아픈 기억이지만 김 감독은 2005년 한국시리즈 패배를 잠시나마 회고할 정도로 당시 아픔을 절반쯤 지운 모습이었다. 한국시리즈를 맞아 수많은 기자들을 마주하고 상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감독으로서 행복한 일이다. 쓸쓸하게 포스트시즌에서 탈락한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라며 웃음을 지어 보인 김 감독이었다. 2차전까지 승리함으로써 김 감독에게 2005년의 아픔은 점점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 아직 한국시리즈는 끝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 감독은 2차전 승리 후에도 모든 공을 선수들에게 돌렸다. 김 감독은 "젊은 선수들이 생각보다 더 잘해주고 있고, 고참들이 팀을 든든히 지탱하고 있다. 나는 그저 분위기만 띄워주려 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낮추는 대신 선수들을 추켜세웠다. 김 감독은 잠실구장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될 3차전을 앞두고 팬들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잠실에는 두산팬들이 경기장을 자주 가득 메워줘 선수들이 오히려 더 긴장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 김 감독의 말. 팬들에게 잠실구장을 가득 메워 선수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내달라는 메시지였다. 김경문 야구가 그려가는 추상화에 이제는 팬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김경문, "2년 전 준우승의 아쉬움 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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