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르트행' 리오스가 남긴 교훈과 추억들
OSEN 기자
발행 2007.12.26 10: 31

[OSEN=이상학 객원기자] ‘철의 에이스’ 다니엘 리오스(35)가 결국 현해탄을 건넜다. 리오스는 지난 25일 오후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월로스 입단을 공식화했다. 계약조건은 1년+1년으로 리오스는 2년간 최대 38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 이로써 리오스의 두산 잔류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야구팬들은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게 됐다. 비록 리오스는 한국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숱한 교훈과 추억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리오스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6년간 215경기 1242이닝 90승59패13세이브 방어율 3.01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리오스가 유무형적으로 남긴 교훈과 추억을 되돌아본다. ① PM 9시의 공포 리오스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때는 지난 2002년이다. 유서 깊은 전통을 자랑하는 호랑이군단 KIA의 빨강 유니폼을 입고 한국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리오스에게 처음 주어진 보직은 마무리. 그러나 리오스는 줄곧 선발투수로만 활약한 선수였다. 마무리 보직은 매우 생소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당시 KIA 코칭스태프는 시속 145km 내외의 묵직한 공을 던지는 리오스가 짧은 이닝 동안 전력투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해 KIA에는 마크 키퍼라는 외국인 선발투수가 또 하나 있었다. 그해 키퍼는 19승9패 방어율 3.34를 기록하며 외국인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리그 다승왕을 차지했다. 리오스는 키퍼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오히려 리오스는 좋지 않은 쪽으로 주목받았다. 이른바 ‘PM 9시의 공포’가 바로 그것. 마무리임에도 매경기 불안한 피칭을 거듭한 리오스를 일컫는 말이었다. 리오스는 그해 7월까지 마무리로 등판한 29경기에서 5승3패13세이브 방어율 3.77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공은 빨랐으나 그 빠른 공을 효과적으로 제구하지 못했으며 잦은 흥분으로 마인드 컨트롤에도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리오스는 혈기왕성한 시기는 이미 지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감정을 완전하게 제어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었다. 마무리로 활약할 때만 하더라도 퇴출설이 심심찮게 들린 리오스는 그러나 선발로 전환한 이후 8월 이후 13경기에서 9승2패 방어율 2.57이라는 대반전을 이루어내며 코칭스태프와 팬들의 애간장을 태운 ‘PM 9시의 공포’를 악몽에서 추억으로 바꿨다. ② 몸쪽 승부와 사구 리오스는 “어머니가 타석에 들어서도 몸쪽 공을 던질 것이다”고 말했다. 그만큼 리오스는 몸쪽 승부를 중요시하고 또 즐긴다. 몸쪽 승부는 투수에게 생명선이다. 몸쪽으로 던질 수 없는 투수는 이미 생명이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 몸쪽을 언제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던질 수 있다면 투수가 택할 수 있는 폭은 더욱 더 넓어지기 마련이다. 리오스는 설령 타자를 몸에 맞는 볼로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몸쪽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리오스의 결정구는 몸쪽 승부가 아니었다. 리오스의 투구 패턴은 대개 몸쪽 승부로 타자에게 위협을 준 후 바깥쪽으로 꽉 차는 직구와 휘어지는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삼았다. 몸쪽 승부를 통해 좌우의 폭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타자들이 상하보다 좌우에서 더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을 감안할 때 리오스의 몸쪽 승부 후 바깥쪽 승부는 최고의 무기였다. 그러나 리오스의 과감한 몸쪽 승부는 종종 화를 부른 적도 있다. 리오스는 매년 15개 이상 사구를 기록했다. 한국에서 활약한 6년 동안 리오스가 기록한 통산 사구는 무려 125개. 활약한 기간이 불과 6년이지만 한국 프로야구 통산 사구 부문에서 당당히 역대 4위에 올랐다. 지난 2003년에는 28개로 한 시즌 최다 사구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사구왕(死球王)이었다. 특히 2003년에는 6월14일 잠실 LG전, 6월19일 문학 SK전에서 2경기 연속 퇴장이라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겪었다. 타자의 머리에 공을 맞힌 것이 퇴장의 이유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타자의 머리를 맞히면 투수는 무조건 퇴장 처리됐다. 리오스의 의도와 관계없이 타자의 머리에 공을 맞히는 경우가 많았다. 몸쪽 승부를 하다 손에서 볼이 빠지는 것이 가장 신경쓰일 정도였다. 리오스는 2004년 4월9일 잠실 두산전에서도 상대 타자 안경현의 머리에 공을 맞혀 퇴장을 당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경기는 개막전. 리오스는 개막전 사상 첫 퇴장선수가 되고 말았다. 몸쪽 승부와 사구는 리오스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③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올해 삼성에서 활약한 제이미 브라운은 지난해 11승에 이어 올해 12승을 달성, 2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올렸다. 일견 그리 대단하지 않은, 오히려 외국인 투수라는 기대치를 감안하면 하찮은 기록으로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브라운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3번째로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따낸‘수준급’ 외국인 투수였다. 이전에는 리오스와 맷 랜들이 유이했다. 외국인 투수가 2년 연속으로 좋은 활약을 보이기란 쉽지 않았다. 투수는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분석이 된다. 특히 한국 프로야구는 8개 구단이 단일리그로 치른다. 그만큼 투수의 장단점이나 습성이 분석되고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리오스는 외국인 투수에게는 유통기한이 없으며 한계가 없다는 것을 몸소 직접 입증해냈다. 한국 데뷔 첫 해 리오스는 마무리와 선발을 넘나들며 14승5패13세이브 방어율 3.14로 활약, 재계약에 골인했다. 2년차 된 2003년, 팀 동료 키퍼는 8승 방어율 3.79에 그치는 등 시즌 중반 KIA를 떠나 두산으로 트레이드됐다. 리오스도 2003년에는 기대만큼 좋은 성적을 거둔 건 아니다. 풀타임 선발투수로 30경기 등판, 10승13패 방어율 3.82를 기록했다. 패수가 승수보다 많다는 점은 외국인 투수에게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오스가 높이 평가받으며 다시 한 번 KIA와 재계약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외국인 투수로는 사상 첫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라는 상징성과 함께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투구이닝(188⅔)이 자리하고 있었다. 리오스는 컨디션이 좋든 그렇지 않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언제나 자기 몫을 기본적으로 해주는 든든한 투수였다. ④ 끝까지 던지는 투수 “끝까지 던지겠다” 리오스가 입버릇처럼 뱉은 말이다. 리오스는 투수 최고 미덕을 끝까지 던지는 것이라 했다. 투수 분업화가 자리잡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 완투경기는 가뭄에 콩나듯 일어났다. 선수들은 프로의식에 입각해 스스로 몸을 사렸고, 감독들도 과거에 혹사로 사라진 투수들을 반면교사 삼아 투수관리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다. 과거 명투수들이 롱런하지 못한 것을 직접 지켜본 야구팬들도 투수 혹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하지만 국내투수들에 대해 엄격한 혹사에 대한 잣대는 그러나 외국인 투수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언젠가는 한국을 떠나게 될 ‘용병’이라는 보이지 않는 시각이 은연 중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0년 이후 한 시즌 200이닝을 돌파한 선수는 단 10명이지만 이 가운데 무려 5명이 외국인 투수였다. 한 시즌 200이닝 돌파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풍토에서도 리오스는 4년 연속 200이닝 돌파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35살이 된 올 시즌에는 무려 234⅔이닝을 던졌다. 서른다섯 이상 나이에 200이닝을 던진 투수는 2002년 송진우(220이닝) 그리고 지난해와 올해 리오스가 유이하다. 게다가 2년 연속 233이닝을 던진 투수는 장명부 이후 리오스가 처음이었다. 200이닝 불모지에 오롯하게 피어난 꽃 한 송이가 바로 리오스였다. 리오스는 마운드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며 많은 이닝을 ‘먹는’ 것이 투수의 최대 임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투수였다. 6년간 매년 2차례 이상씩 완투를 하는 등 21차례 완투경기와 7차례 완봉승도 리오스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는 수치들. 그는 동료들의 짐을 덜어주는 진정한 에이스였다. ⑤ 김상훈과의 포옹 외국인선수는 불안정한 고용자 신세나 다름없다. 몇 년을 잘해도 한 시즌을 망치거나 퇴조 기미를 보이면 당장 짐을 싸야 하는 것이 프로에서 외국인선수들의 운명이다. 리오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4년 리오스는 32경기에 등판, 17승8패 방어율 2.87로 맹활약하며 외국인 투수로는 사상 두 번째로 다승왕을 차지했다. 2004년은 리오스에게 찾아온 실질적인 첫 전성기였다. 하지만 이듬해 리오스는 이유 모를 부진에 빠졌다. 2005년 전반기 동안 리오스는 19경기에 선발등판했지만, 6승10패 방어율 5.23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전반기 경기당 평균 투구이닝도 5.98이닝으로 나쁘지 않은 수치였지만 리오스의 명성을 감안하면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결국 KIA는 리오스를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눈치가 빠른 리오스가 이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할 리 없었다. 2005년 7월7일 대구구장. KIA 선발투수 리오스는 위태위태했다. 퇴출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감지한 리오스였다. 리오스는 2003년에도 롯데로 트레이드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언더셔츠에 ‘L(롯데) TRADE’라는 문구를 달고 무언의 시위를 벌인 바 있었다. 리오스는 직감적으로 이날 경기가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삼성 조동찬에게 결정적인 만루홈런을 맞는 등 5⅓이닝 6실점(5자책)으로 무너졌다. 조동찬에게 홈런을 맞은 직후 이광우 투수코치에게 공을 넘겨준 리오스는 마운드를 내려가기 전 포수 김상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김상훈과 짧지만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리오스가 KIA에 입단한 2002년을 전후로 김상훈은 KIA의 주전포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리오스와도 배터리로서 좋은 호흡을 과시했다. 리오스가 김상훈에게 한 포옹은 그간 자신과 함께 한 포수에 대한 마지막 인사였다. 팬들은 자칫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무대에서 마지막까지 동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은 리오스의 프로의식에 감동했다. ⑥ 거짓말 같은 반전 결국 리오스는 2005년 7월10일, 2대1 트레이드를 통해 정든 KIA를 떠나 두산에 새 둥지를 틀었다. 치열한 순위다툼을 벌이던 두산은 비어있던 외국인선수 한 자리를 리오스로 채우기로 결정하며 전병두라는 미래가 기대되는 왼손 유망주를 내주는 출혈까지 감수했다. 당시 트레이드는 ‘현실을 얻은 두산, 미래를 얻은 KIA’로 축약됐다. 머지않아 KIA가 웃을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리오스도 한계를 다한 외국인 투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올해까지 미래는 오지 않은 채 현실이 계속됐다. 특히 2005년 전반기 동안 리오스는 KIA에서 최악의 나날을 보냈으나 후반기 두산으로 이적한 이후 거짓말 같은 반전을 이뤄내며 두산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앞장섰다. 2002년 마무리에서 선발 전환 이후의 반전은 2005년 반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두산 이적 후 리오스에게는 기적이 일어났다. 13경기에 선발등판, 9승2패 방어율 1.37이라는 특급 성적을 남긴 것이다. 경기당 평균 투구이닝은 무려 7이닝(7.05)을 넘길 정도였다. 전반기와 후반기 성적은 그야말로 비교체험 극과 극이었다. 방어율(5.23→1.37), 투구이닝(5.98→7.05), WHIP(1.54→0.93), 피안타율(0.315→0.199)까지 모든 기록이 최악에서 최상급으로 달라졌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었다. 당시 전반기 KIA 내야진은 최악의 수비력으로 리오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열정적이지만 다혈질인 리오스가 마운드에서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지 못했다. 당시까지 홈런공장이었던 작은 광주구장도 리오스에게는 악재였다. 하지만 유격수 손시헌이 중심이 된 두산 내야진의 수비는 훨씬 안정돼 있었으며, 드넓은 잠실구장도 리오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거짓말 같은 반전의 이유였다. ⑦ 갈베스와의 대조 2001년 삼성 외국인 투수 발비노 갈베스는 ‘살아있는 양치기 소년’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에서 외국인 에이스로 명성을 떨쳤던 갈베스는 2001년 5월 삼성의 대체 외국인선수로 한국에 발을 디뎠다. 명성대로 갈베스는 초특급 투수엿다. 5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3개월 동안 10승4패 방어율 2.47이라는 특급 성적을 남겼다. 4경기 연속 완투승도 있었다. 그러나 갈베스는 2001년 8월20일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미국으로 출국한 뒤 45일 동안이나 입국을 미뤘다. 입국 연기만 해도 7차례. 갈베스는 어깨 부상 치료를 이유로 삼성 구단과 복귀를 놓고 갈등을 빚었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1·4차전에서 갈베스는 6이닝 도합 10실점이라는 최악의 피칭으로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말았다. 때 아닌 갈베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리오스 때문이다. 지난해 9월12일 마산 롯데전에서 리오스는 역대 19번째 선발타자 전원 탈삼진을 잡아낸 바로 다음날 고향 미국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올랐다. 폐암 투병 중인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떠나기 직전 리오스는 구단에 다음 등판일을 거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구단은 내심 갈베스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리오스는 예정대로 9월16일 오후 5시 귀국, 곧장 선수단에 합류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17일 KIA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 선발등판했다. 더욱 놀라운 건 리오스가 미국에서도 한국시간에 맞춰 잠을 자는 등 컨디션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는 사실. 리오스는 이날 경기에서 8이닝 3실점(2자책)으로 호투했지만, 팀 타선의 지독한 부진으로 패전의 멍에를 썼다. 그러나 모두가 리오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진정한 프로정신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⑧ 부친상 그리고 9구 3삼진 지난 6월10일. 폐암으로 긴 투병생활을 한 리오스의 부친은 1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안타깝게 결국 숨을 거두었다. 부친상을 당한 리오스는 10일 곧바로 고향 마이애미로 돌아갔다. 마이애미로 돌아가기 직전 리오스는 지난해 9월처럼 약속을 했다. 어떻게든 다음 등판일을 지키겠다는, 지극히 ‘리오스스런’ 약속이었다. 두산 구단은 리오스의 마음만으로도 고마웠다. 등판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외국인선수도 프로 이전에 엄연히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리오스는 다시 한 번 예정대로 6월15일 한국으로 돌아왔고 귀국한 지 하룻만인 16일 문학 SK전에서 선발등판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이날 경기에서 리오스는 8회말 SK 이진영-박경완-최정을 차례로 헛스윙 3구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등 프로야구 최초의 1이닝 9구 3삼진이라는 진기록까지 세웠다. 자신에게 야구를 가르쳐준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무려 22시간의 비행에 따른 극도의 피로조차 마운드에서 투혼을 뿌린 리오스를 저지할 수 없었다. 사실 당시 리오스의 SK전 선발등판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정신적인 슬픔도 그렇거니와 미국과 한국을 왕복하는 장시간 비행으로 육체적으로도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오스는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부터 잠실구장에서 불펜피칭을 하며 컨디션을 조절했고 미국에 갈 때에도 공인구 3개를 가져가 감각을 잃지 않으려 했다. 리오스는 15일 인천공항에 귀국하자마자 문학구장으로 달려가 캐치볼로 몸을 푸는 투혼을 발휘했지만, 시차 적응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리오스는 선발등판 약속을 지켰고 9이닝 무실점 완봉승으로 SK 타선을 제압하며 소속팀 두산을 당당히 단독선두로 올려놓았다. 초인적인 투혼에 두산팬들은 물론이고 야구팬들 모두가 감동했다. 프로야구 최초의 1이닝 9구 3삼진은 그래서 더욱 빛났다. ⑨ 2007년 천하통일 2007년은 리오스의 해였다. 올 시즌을 앞두고 7년간 한화에서 근속한 제이 데이비스가 떠나면서 현역 최장수 외국인선수 타이틀은 리오스에게 넘어갔다. 최장수 외국인선수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리오스는 5월부터 무서운 행진을 벌이며 리그를 장악했다. 5월 6경기 5승1패 방어율 0.79, 6월 5경기 4승 방어율 0.95, 7월 6경기 4승1패 방어율 1.50. 5~7월 도합 성적은 12승2패 방어율 1.09밖에 되지 않는다. 이 기간 동안 투수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1-0 완봉승을 3차례나 해내는 등 완봉승으로 4승이나 따냈다. 그리고 마침내 9월20일 수원 현대전에서 7이닝 동안 8피안타 2볼넷을 허용했지만 2실점으로 현대 타선을 막고 승리투수가 되며 한국 프로야구 사상 15번째 20승이자 5번째 선발 20승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였던 10월3일 잠실 현대전에서는 9회 1아웃까지 퍼펙트 행진을 벌이며 또 하나의 대기록을 달성하기 직전까지 갔다. 2007년 리오스의 성적은 33경기 22승5패 방어율 2.07. 승률은 무려 8할1푼5리였다. 다승·방어율·승률은 물론 선발등판(33)·투구이닝(234⅔)·WHIP(1.06)·피안타율(0.223) 등 공식 타이틀이 아닌 각종 부문에서도 1위를 독식했다. 완봉(4회)·완투(6회) 모두 1위였고, 탈삼진도 147개를 잡아내 전체 2위에 올랐다. 결정적으로 1999년 정민태 이후 8년 만에 20승을 돌파했고, 1983년 장명부 이후 무려 24년 만에 선발 22승이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또한 리오스는 유일한 아킬레스건이었던 큰 경기 징크스까지 털어냈다.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8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된 리오스는 SK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9이닝 무실점의 완벽투로 완봉승을 따냈다. 한국시리즈 역대 8번째 완봉승이자 최소투구수 완봉승으로 값어치가 더욱 빛났다. ⑩ SIR 리오스 선배님 2007년을 자신의 해로 만든 리오스는 당당히 1998년 타이론 우즈에 이어 외국인으로 사상 두 번째로 페넌트레이스 MVP를 차지했다. 리오스의 곁에는 신인왕을 수상한 임태훈이 있었다. 신인왕 자격으로 임태훈은 시상식에서 리오스와 함께 했다. 임태훈은 리오스에게 꼬박꼬박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임태훈은 “리오스 선배님이 많은 조언을 해주신 것이 도움이 됐다. 리오스 선배님은 자기관리가 정말 철저한 분이다. 등판 전날 음식조절·몸관리 등이 철저하시다. 항상 열심히 하는 자세로 게으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시려고 노력한다. 정말 훌륭한 선배님”이라며 존경심을 표했다. 리오스는 이미 국내선수들 사이에서도 외국인선수 아닌 외국인선수였다. 동료들에게는 ‘SIR 리오스’, 후배들에게는 ‘리오스 선배님’이었다. 리오스의 프로의식은 마운드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등판하지 않는 날에는 덕아웃과 불펜에서 팀 분위기를 주도했다. 카메라를 향해 허물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엔터테이너의 측면까지 갖췄다. 무엇보다 리오스는 한국 리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 리오스에게는 한국 리그가 곧 메이저리그였다. 리오스는 한국생활과 문화를 견디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즐겼다. 가족끼리 무궁화호를 타고 기차 여행하는 것을 즐겼던 리오스는 KIA 시절 지리산, 무등산 등 전라도 지역을 제 집 드나들듯 누볐다. 지난해 김광수 수석코치가 조모상을 당했을 때에는 구단 직원을 통해 조의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한국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토종’ 외국인선수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두산에서 리오스는 지하철을 타고 잠실구장을 출퇴근하며 수많은 팬들을 직접 대하는 등 스스럼없는 모습으로도 팬들의 사랑받았다. 리오스는 지난 11일 골든글러브 시상식에 참석했다. 시즌이 종료되고도 한참 뒤에 열리는 골든글러브 시상식에 외국인선수가 참석한 것은 리오스가 처음이었다. 물론 리오스에게는 두산과의 재계약 협상이라는 ‘프로의 비즈니스’가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날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리오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리오스에게 한국을 배신하고 일본으로 떠난 선수라고 손가질할 수는 없다. 리오스는 아내와 자식을 둔 집안의 가장이다. 돈 앞에서는 외국인선수도 어쩔 수 없는 용병이지만 용병도 선수 이전 한 사람이다. 리오스에게 ‘용병’이라는 용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출중한 기량과 투철한 마인드 그리고 프로다운 매너까지 삼박자를 두루두루 갖춘 리오스는 진정한 ‘반(半) 한국인’이었다. 리오스 같은 선수를 데리고 있었던 KIA와 두산, 리오스 같은 선수를 지켜봤던 한국 야구팬들은 분명 행운이었다. 리오스는 살아있는 교훈의 대상이었으며 이제는 추억의 대상으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회자될 것이다. . . 日 야쿠르트, 리오스 영입 공식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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