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마해영, 그들은 지금도 야구한다
OSEN 기자
발행 2008.01.12 10: 31

[OSEN=이상학 객원기자] 차가운 겨울이다. 현대 유니콘스 매각 작업에서 3연타석 삼진을 당한 야구계는 그 어느 때보다 춥고 차가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래 가장 추운 겨울이 될지 모른다. 곳곳에서 우울한 소식이 야구계를 둘러싸고 있다. 음울한 기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을 뿌연 포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울한 야구계에도 이대로 물러서지 않고 있는 두 베테랑이 있다. 바로 양준혁(39)과 마해영(38)이다. 둘은 공통점이 있다. 위기를 겪었고 또 겪고 있지만,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고 또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은 지금 고향에서 초심으로 야구를 하고 있다.
▲ 극과 극
양준혁은 지난 10일 삼성과 2년간 최대 24억 원을 받는 조건으로 연봉계약을 체결했다. 조금 특이한 계약이다. 지난 2005시즌 종료 후 FA가 된 양준혁은 2년간 최대 18억 원에 계약했다. 하지만 FA가 아닌데도 올 겨울에는 훨씬 더 좋은 조건에 계약을 체결했다. 더군다나 양준혁은 우리나이로 마흔, 불혹이다. 하지만 삼성 구단은 지난 2년간 양준혁이 보여준 놀라운 실적에 거액을 지불했다. 프로세계에서 연봉 계약은 과거 성과만큼 앞으로 어떤 실적을 올릴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삼성 구단이 양준혁에게 거액을 지불한 것은 ‘당연히’ 앞으로 올릴 실적에 대한 기대가 반영돼 있다.
양준혁에 비해 마해영은 그야말로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올 겨울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서글프다. 2006시즌 종료 후 마해영은 LG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FA 계약기간이 1년 남았음에도 조기방출됐다. 이후 방출 철회와 함께 다시 LG 유니폼을 입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올 시즌 후 다시 방출됐다. 한 구단으로부터 두 번이나 방출을 당한 셈이다. 이것도 초유의 일일지 모른다. 지난 2003시즌 종료 후 4년간 최대 28억 원이라는 ‘FA 대박’을 터뜨린 마해영은 그러나 이후 추락을 거듭했다. 계약 후 성적은 마해영의 이름값과 몸값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2008년 1월, 불혹의 나이에 당당히 연봉서열 전체 2위에 올라있는 양준혁과 고향팀 롯데에서 테스트를 받고 있는 마해영의 처지는 극과 극이다. 과거 두 선수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한국 프로야구 간판타자 자리를 함께 양분했다. 많은 야구팬들은 둘을 ‘좌준혁-우해영’이라고 불렀다. 오픈스탠스라는 흔치 않은 타격폼으로 투수들을 잡아먹을 듯한 위압감은 이승엽의 부드러움과는 또 다른 위엄이 있었다. 두 선수는 상무 시절 한솥밥을 먹을 때부터 닮은꼴이었다. 비슷한 타격폼에 지독한 훈련벌레였다는 점 그리고 선수협의회 창설을 주도한 뒤 구단에 미운 털로 찍힌 것도 닮았다. 둘에게 극과 극은 분명 안 어울린다.
▲ 노장의 열정
양준혁과 마해영이 지금 놓인 처지는 극과 극이지만, 그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결코 극과 극이 아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개인 통산 2000안타라는 위업을 달성한 양준혁의 열정은 익히 알려져있다. 안타(2095)를 비롯해 타점(1272)·득점(1189)·2루타(420)·볼넷(1141)·루타(3554)까지 6개 부문에서 역대 프로야구 1위에 올라있다. 장종훈이 보유하고 있는 홈런(340) 기록도 머지 않아 양준혁으로 이름이 바뀔 것이다. 양준혁은 통산 홈런 331개로 역대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양준혁은 지난해 6월9일 잠실 두산전에서 2000안타를 달성한 이후 72경기에서 95안타를 더 추가하며 타율 3할6푼을 기록했다. 목표 달성 후 공허함은 전혀 없었다.
마해영의 기록은 양준혁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마해영은 이승엽·타이론 우즈와 함께 프로야구에서 3년 연속 30홈런 이상을 날린 3명의 선수 중 하나이다. 통산 타율 2할9푼5리는 역대 14위에 해당하는 고타율이며 통산 홈런 258개도 역대 6위에 해당한다. 통산 타점도 995개로 당당히 역대 4위다.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현역선수를 기준으로 하면 타율은 7위, 홈런은 4위, 타점은 3위가 된다. FA 계약기간이었던 지난 4년간 기대치를 밑도는 활약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마해영이 그전까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를 대신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가짐이다. 양준혁은 “올해 마흔 살이 된다. 하지만 변함없이 운동장에서 가장 열심히 1루까지 질주하는 선수로 팬들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양준혁은 “내일은 없다. 매경기 매타석 최선을 다할 뿐이다. 개인 타이틀에 연연하면 선수가 아니다”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물론 양준혁은 화장실에 갈 때에도 KBO 기록 연감을 들고가 꼼꼼하게 체크할 정도로 기록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궁극적으로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먼저라는 것을 가장 잘 알고 또 실천으로 옮기는 선수다. 부상을 당해도 쉽게 픽픽 쓰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타석에서 집중하다 보면 아픈 것도 잊어버린다”고 말하는 양준혁이다. 양신이 아니라 불사신이다.
마해영은 또 어떤가. 마해영은 “악플도 나를 알기에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수의 열정을 그라운드에서 확인할 길을 많지 않다. 지난 4년간 ‘FA 먹튀’라는 오명을 쓴 마해영에게는 무서운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6년 최하위로 추락한 LG에서 가장 열성적이었던 선수가 바로 마해영이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희생번트를 댔으며, 병살타를 치고난 후에는 자책감에 방망이와 헬멧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태그업을 위해 3루에서 헬멧을 벗어던지고 전력질주해 홈에서 세이프되는 장면까지 연출했던 마해영이다. 당시 양승호 감독대행은 마해영에 대해 “우리 팀에서 제일 열심히 한다. 베테랑이지만 가장 성실하다. 마해영을 빼라고 하는 사람들은 뭘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 위기는 기회
따뜻한 겨울을 나고 있는 양준혁이지만, 사실 그에게도 위기가 예고없이 덮친 기억이 있다. 특히 2005년의 부진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배트 스피드가 예전만 못했고 특유의 오픈 스탠스도 허점 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여느 노장 타자들처럼 몸쪽 공에도 대책이 서지 않았다. 모두가 수군거렸다. ‘양준혁은 이제 한물 갔다’고. 하지만 양준혁은 고집을 부리는 대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변화를 받아들였다. 극단적인 만세타법을 버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내딛는 오른쪽 발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타격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고 언제나처럼 1루로 전력질주했다. 한 경기, 한 타석, 한 순간마다 집중한 결과가 바로 화려한 부활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마해영도 양준혁의 과정을 밟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마해영 역시 양준혁이 처한 문제와 비슷하다. 배트스피드는 무뎌졌고, 오픈스탠스는 타격의 정확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스타일을 고수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해영이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데뷔 후 가장 많은 훈련을 소화했다. 올 겨울 롯데에서 입단 테스트를 앞두고 “올 시즌 도전해보고 안 되면 과감하게 포기하겠다”고 말한 마해영은 롯데 첫 합동훈련을 앞두고는 아예 “자존심을 버렸다”고 각오를 다졌다.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으로 후배들을 이끄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서로 처해있는 상황은 다르지만, 양준혁과 마해영이 방망이를 들고 야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양준혁은 불혹의 나이에도 20·30대 선수 못지않은 실적을 올리고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입증하고 있다. “나이 이야기는 하기 싫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순발력도 떨어지고,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더 열심히 치고 달려서 고정관념을 깨고 싶다”는 것이 양준혁의 의지다. 마해영은 마지막까지 야구를 포기하지 않는 노장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고 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불혹을 앞둔 노장이 입단 테스트까지 감수하며 현역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것 자체가 매우 큰 귀감이 된다.
또 하나. 수구초심의 심정으로 고향팀에 충성과 맹세를 다짐하고 있다는 것도 닮아있다. 양준혁은 “향후 수년간 지금같은 페이스로 열심히 뛰어 목표를 이루었을 때 내가 입고 있을 유니폼은 변함없이 파란색”이라고 천명했다. 마해영은 “고향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가을에도 야구하자’는 부산팬들의 소망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두 선수 모두 한 때 팀을 떠났지만, 결국에는 돌아왔다. 마해영은 아직 롯데 입단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롯데의 전설’이 롯데에서 테스트를 받는다는 것이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LG 김재박 감독은 “양준혁과 마해영은 타고난 기술이 다르다”고 했지만 양준혁과 마해영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고향팀에 대한 애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양준혁과 마해영을 보고 있노라면, 프로야구가 처한 작금의 현실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프로야구는 지금 큰 위기에 처해있다. 양준혁과 마해영처럼 말이다. 양준혁과 마해영은 고집을 꺾고 자존심을 버리고 변화를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프로야구는 변함없이 프로야구 그대로였다. 변한 것이 없었다. 변화 없음은 곧 도태를 의미한다. 프로야구는 지금 그동안 도태되고 또 도태된 것이 결국에는 한꺼번에 곪아터진 꼴이다. 양준혁과 마해영처럼 변화를 위해서라면 프로야구 전체가 자존심을 버리고 몸부림쳐야 한다.
두렵고도 무서운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을 측정할 수 없는 질량의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양준혁과 마해영처럼 초심으로 되돌아간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양준혁과 마해영이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지금 고향에서 계속해 야구하는 것처럼 프로야구도 위기를 기회로 삼아 뼈를 깎는 노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